가지를 움켜쥐었던 악력

06. 자애심 自愛心

by 김민경

자애심 自愛心


높게 세운 깃발이 꺾일까 두려워

나를 다그치며 살았다.


빛나지 않는 문장은 죄인인 것 같아

실패라 부르며 어둠 속에 던져두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설익은 과일이 바닥으로 떨어져

단맛 한 번 내지 못하고 멍이 든 자리에도,


채 피어나기도 전에 고개를 숙인

베란다의 이름 모를 화초 곁에도

살고 싶어 했던 치열한 숨이 맺혀 있었음을.


자존심이라는 높은 성벽 대신

자애심이라는 낮은 울타리를 친다.


부서진 파편들을 모아

이것도 나의 문양이라 말해주는 일.


나의 지질한 성찰조차

꽃을 피우기 위한 정직한 퇴비였음을 믿어주는 일.


나는 오늘 밤

나의 가장 보잘것없는 문장 하나를

품에 안고 잠이 든다.


참 애썼다, 나의 진심아.



-




오랫동안 나는 나의 가장 엄격한 교도관이었다. 나의 완벽주의는 떼어낼 수 없는 신체의 일부 같았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빚어낸 일그러진 마음은 늘 나를 감시했다. 타인의 머리칼을 만지는 미용사로 살 때에도, 가위를 내려놓고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도 나는 나 자신을 한 번도 따뜻하게 쓰다듬어 본 적이 없었다.


손님의 머리칼 한 올이 삐져나온 것에 온종일 자괴감을 느끼고, 수차례 퇴고를 거듭하며 문장을 고치는 일은 더 나은 결과물을 향한 열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완벽하지 않으면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공포를 잠재우기 위한 처절한 의식이었다.


누군가는 섬세함이라 칭찬했던 나의 감각이, 실은 나를 찌르는 창날이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일은 아프다. 가위를 든 손이 떨릴 때마다 나는 숙련되지 못한 나를 증오했고, 문장 사이의 여백이 채워지지 않는 날엔 재능 없는 나를 폐기하고 싶었다. 노트북 휴지통에는 차마 세상에 내놓지 못한 비명 같은 초고들이 가득 쌓여갔다.


"나는 왜 이것밖에 못 할까", "이게 정말 나의 최대치인 걸까" 같은 노골적인 절망과 자책이 담긴 글들. 남들에게 보여주기엔 너무 구차하고, 스스로 읽기엔 서투른 그 기록들은 나의 수치심 그 자체였다. 나는 그 문장들을 나의 일부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아 어둠 속에 던져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마트에서 사 온 사과 다발이 채 먹기도 전에 멍이 들어 대부분을 버려야 했다. 껍질을 깎아내자 드러나는 거뭇한 흔적들을 보며 혀를 찼다. 멍이 든 부분은 칼날이 부드럽게 들어가지 않았다. 싱싱한 과육의 아삭함 대신 푸석푸석하고 뭉개진 질감이 칼끝을 타고 전해졌다. 도려내려 할수록 사과는 더 흉하게 뭉개졌고, 그 답답한 감각 앞에서 나는 묘한 슬픔을 느꼈다.


"너도 네가 원해서 그렇게 변한 건 아닐 텐데."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입에 들어오기도 전에 쓰레기통으로 향하는 사과들을 보며 마음 한편이 씁쓸해졌다. 그때 문득 두려움이 밀려왔다. ‘쓸모’와 ‘완벽함’을 기준으로 생을 폐기하는 그 가혹한 저울이, 지금껏 나 자신을 달아왔던 저울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내가 세운 성벽은 외부의 비난을 막아주는 요새인 줄 알았으나, 실은 멍든 조각 하나만 발견되어도 통째로 폐기 처분해 버리는 가혹한 심판대였다. 단맛을 증명하지 못한 사과를 쓰레기통에 던지듯, 나는 성과를 내지 못한 나의 시간들을 얼마나 많이 어둠 속에 던져왔던가.


쓰레기봉투 속에 처박힌 사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트 가판대에 오르기까지 저 사과가 온몸으로 받아낸 중력의 무게와, 낙과(落果) 하지 않기 위해 가지를 움켜쥐었던 안간힘의 흔적들이 보였다. 맛을 증명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생존의 시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멍이 들기 전까지 뜨거운 햇빛을 견디고 지루한 장마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자신만의 시간을 쌓아왔을 그 사과의 생애를, 결과가 쓰레기통일지언정 '실패'라는 단어 하나로 지워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의 지질한 성찰과 부끄러운 고백들도 다르지 않았다. 휴지통에 처박힌 "나의 최대치가 이것뿐인가"라던 못난 문장들도, 사실은 어둠 속에서도 기어이 빛을 찾아 뻗으려 했던, 나만의 치열한 광합성의 기록이었음을 이제야 수긍한다. 나는 이제 결실의 유무로 삶을 재단하던 가혹한 저울을 버리고, 매달려 있던 시간 그 자체를 긍정하기로 했다.


나 자신을 벽돌 삼아 쌓아 올린 성벽을 허물고 자애심이라는 낮은 울타리를 친다. 울타리는 나를 대단한 존재로 보이게 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길을 잃고 돌아온 못난 나를 따뜻하게 거둬줄 수는 있다. 울타리 안의 풍경은 그리 화려하지 않다. 민망한 상처자국과 채 피지 못한 의욕들이 흩어져 있지만, 그 그늘진 구석조차 나의 영토임을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성벽 밖의 바람 소리가 무섭지 않게 되었다.


나는 오늘 밤, 나의 가장 보잘것없는 문장 하나를 지우지 않고 가만히 품에 안는다. 여전히 서툴고 빛나지 않지만, 이 한 줄을 쓰기 위해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던 나의 진심을 이제는 죄인 취급하지 않기로 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멍들고 푸석해진 채로도 나는 여전히 여기 존재하고 있으니까.


겨울의 끝자락, 나에게 처음으로 손을 내민다. 참 애썼다, 나의 진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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