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나이테

07. 소나무

by 김민경


소나무


가시를 세운 듯 가늘고 뾰족한 잎들이

스스로를 경계하듯 온몸을 감쌌다.


스쳐가는 새들의 발톱과 곤충의 작은 이빨에

여린 살갗은 금세 생채기가 났다.


날카로운 외면과 달리, 속살은 무르고 투명하여

드러난 자리마다 치열한 눈물이 고인다.


상처는 천천히 굳어 스스로를 메우고

시간의 바람 속에서 딱딱하게 굳어

거친 껍질 위에 황금빛 문장을 새겼다.


그는 굳은 그 흉터를 훈장삼아 다시 바람을 맞는다.

옅은 통증 위에 또 하나의 나이테를 덧입히며,

그렇게 상처 위에 또다른 계절을 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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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다가가 바라본 소나무의 표면은 생각보다 훨씬 거칠고 울퉁불퉁하다. 날카로운 잎을 세워 스스로를 무장한 겉모습과 달리, 그 속살은 의외의 연약함을 품고 있다. 스쳐 가는 바람의 얇은 손톱에도, 작은 생채기에도 금세 흠집이 나고 마는 것이다. 상처가 생기면 그 틈으로 송진이 흘러나온다. 금이 간 자리를 감싸고 드러난 살결을 덮으며, 소나무는 다시 외부로부터 자신을 지켜낸다.


그 모습은 단순한 생존을 넘어, 소나무가 오랜 세월 선택해 온 삶의 방식처럼 보인다. 상처를 억지로 지우지 않으면서도, 그 아픔에 매몰되지 않는 법. 스스로에게 필요한 만큼의 치유를 흘려보내, 끝내 그 상처 위로 단단하고 새로운 표면을 덧입히는 방식 말이다.


우리는 흔히 타인에게 받은 상처를 '흉터'라고 부르며 숨기기에 급급하다. 하지만 소나무에게 상처는 숨겨야 할 치부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더 단단하게 결속시키는 계기가 된다. 흘러나온 송진은 공기와 만나 딱딱하게 굳으며 상처를 메우고, 그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고유한 무늬가 되어 나무의 몸통에 각인된다. 타인이라는 바람에 흔들리고 긁힌 자국들이 모여 비로소 한 그루의 소나무라는 '형체'를 완성하는 셈이다.


내 안의 시간들을 천천히 복기해 보았다. 상처를 그저 견디기만 해서는 결코 '회복'이라 부를 수 없던 날들이 있었다. 억지로 잊으려 애쓰거나 그저 시간이 흐르기만을 바랐던 태도는, 오히려 기억의 날을 더 날카롭게 세워 마음을 베어 오곤 했다. 타인이 던진 무심한 말 한마디가 박힌 자리를 방치했을 때, 그곳은 치유되지 못한 채 곪아 터지기 일쑤였다.


그러나 회복은 늘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고개를 들었다. 식탁에 마주 앉아 온기 어린 대화를 나누며 마음을 가라앉히던 찰나, 붉게 물드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팽팽하던 숨이 느슨해지던 순간, 익숙한 옷을 걸치고 걷던 산책길의 마른 냄새. 그런 사소한 일상의 조각들이 송진처럼 내 안으로 흘러 들어와 상처의 표면을 서서히 메워주었다. 타인에게 입은 상처를 치유하는 것 또한 결국은 또 다른 타인의 다정한 손길이거나, 그들이 남긴 미미한 온기였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면서도 안도감을 주었다.


그 순간부터 상처는 더 이상 날 것 그대로의 고통이 아니었다. 그것은 천천히 굳어 내 삶의 새로운 무늬가 되었고, 나를 다시 모진 바람 앞에 세워주는 단단한 옹이가 되었다. 회복이란 대단한 반전이 아니라, 지극히 작은 온기들이 내 마음에 스며드는 순간 시작된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소나무가 상처 위에 황금빛 문장을 새기듯, 나 또한 타인이 남긴 생채기 위에 나만의 회복력을 덧칠하며 나이테를 늘려가고 있었다.


소나무는 상처를 없애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상처에만 머물러 있지도 않는다. 그저 그 위로 치유의 액체를 흘려보내 고통의 의미를 바꾸어 갈 뿐이다. 그 정직한 방식으로 계절을 건너며 자신의 생을 완성해간다. 상처를 숨기지 않으면서도 그 흉터를 훈장 삼아 나아가는 법, 회복의 계기가 찾아올 때 기꺼이 그 흐름에 몸을 맡기는 법을 소나무는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어느 날 예고 없이 흘러나온 송진처럼, 나를 다시 살게 하는 힘은 생각보다 소리 없이 도착한다. 그것은 때로 타인의 다정한 위로이고, 때로는 홀로 마주하는 고요한 고독이며, 때로는 이유 없이 마음을 덮어주는 계절의 온기다. 그 힘이 상처 위에 단단히 자리 잡는 순간, 나는 비로소 또 한 계절을 무사히 건너갈 용기를 얻는다. 거친 껍질 속 황금빛 송진의 문장을 간직한 채, 나는 다시 다가올 가을의 바람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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