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무게의 고집
무게의 고집
거대한 열차는 선로가 끝난 뒤에도
한참을 더 미끄러져 간다.
너를 향해 붙은 가속 때문인지
비어있던 자리마다 너라는 질량을 채웠고,
기울기를 바로 세우려 안간힘을 쓸수록
더 깊게 미끄러졌다.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한 속력을 견디며
끝을 알 수 없는 너에게로 끝없이 쏟아졌다.
멈추는 법을 잊은 것이 아니라,
사랑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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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열차는 선로가 끝난 뒤에도 한참을 더 미끄러져 간다. 물리적인 동력은 이미 끊겼을지 몰라도, 그 몸체가 가진 거대한 질량과 속도가 스스로를 밀고 나가는 것이다. 기계조차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해 멈추지 못하는데, 사람의 마음은 오죽할까. 우리는 누군가를 열렬히 통과한 뒤에도 그 가속도를 이기지 못해 자꾸만 허공 위를 미끄러지곤 한다.
이 미끄러짐은 비단 나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세상에는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해 휘청이는 타인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아이를 잃고 유모차의 빈자리를 여전히 피하지 못하는 부모의 걸음이나, 평생을 함께한 반려를 먼저 보내고 식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수저 한 쌍을 치우지 못해 고독을 씹는 노인의 등 같은 것들.
그들의 삶이 자꾸만 과거로 미끄러지는 것은 그들이 약해서가 아니라, 내면에 고인 누군가의 부피가 너무 거대하기 때문이다.
과거에 나 역시 손목을 타고 넘어오던 그 지독한 질량을 기억한다. 그날그날 손님들이 쏟아낸 생의 무게였다. 깃털처럼 가벼운 농담부터 납덩이처럼 무거운 절망까지, 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손님은 떠났으나, 내 손목엔 그들이 투척하고 간 질량의 여진이 한참이나 남았다.
누군가의 머리카락을 만지는 일은 그가 버티고 있는 생의 중력을 나누어 갖는 일이었다. 타인을 수용한다는 것은 이렇듯 내 몸의 수평을 내어주는 일임을, 나는 가위 끝에 걸리는 눅눅한 사연들을 통해 배웠다.
나 역시 너라는 존재가 내 삶에 진입했을 때, 가장 먼저 변한 것은 나의 손끝이었다. 늘 1인분의 정량을 가늠하던 감각은 새로운 질량을 수용하기 위해 속절없이 무너졌다. 혼자일 땐 단 한 번도 넘친 적 없던 냄비가 2인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끓어 넘칠 때, 나는 비로소 사랑에 붙은 가속을 실감했다.
식탁의 수평은 무너졌고, 장바구니의 무게는 두 배가 되었다. 하지만 그 무거움이 나를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이 땅 위에 단단히 정박하게 한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그 변화는 책장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내 취향으로만 정갈하게 정렬되어 있던 책들 사이로 낯선 문장들이 섞여 들어왔다. 내가 한 번도 집어 들지 않았을 저자들의 책들이 내 책장 한구석을 차지하기 시작했을 때, 처음엔 그것이 내 질서를 침범하는 불청객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그 이질적이던 책등들이 어느덧 내 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이제는 어떤 것이 나의 영역이고 상대의 영역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다시 분류하려 애쓰며 버틸수록 나는 오히려 그가 만든 중심 안으로 더 깊이 빨려 들어갔다. 타인의 문장이 내 생각이 되고, 그 단어가 내 언어가 되는 그 섞임의 과정은 내가 가진 가장 고집스러운 경계를 허물어뜨렸다.
사람들은 기울어진 삶을 불안해하며 다시 수평을 찾으라 말한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기울어진다는 것은 나의 세계가 그만큼 넓어졌다는 가장 뜨거운 지표다. 완벽한 수평이란 누구와도 섞이지 않겠다는 선언이자 고립된 자아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누군가에게 기꺼이 기울어진다는 것은, 나의 영토를 허물어 타인의 중력을 받아들였다는 정직한 사랑의 증거다.
우리는 이제 기울어진 채로 걷는 법을 배운다. 그것은 무너진 것이 아니라, 타인이 내게 남긴 온기를 간직한 채 새로운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비어있는 자리를 채웠던 너의 무게를 억지로 덜어내지 않고, 그 무거움이 주는 안락함을 누리며 묵묵히 미끄러져 가는 것.
그것은 타인을 향해 낼 수 있는 가장 다정한 고집이다. 밤하늘의 달이 제 스스로 빛나지 못해도 지구가 당기는 중력의 질량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궤도를 도는 것처럼, 우리 역시 서로를 공전하며 그 무게를 견디는 존재들이다.
멈추는 법을 잊은 것이 아니라, 사랑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던 탓이다. 선로가 끝난 뒤에도 우리는 한참을 더 미끄러질 수밖에 없다. 내 안에 남겨진 타인의 질량이 다 소모될 때까지, 이 고집스러운 미끄러짐을 견디는 것이 우리가 가을을 통과하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가을의 끝자락, 낙엽이 쌓인 길 위를 기우뚱하며 걷는다. 내 어깨 위에는 여전히 네가 두고 간 말들이, 네가 빌려준 책들의 무게가, 그리고 우리가 함께 끓여냈던 2인분의 기억이 얹혀 있다.
나는 이 무거움을 사랑한다. 이 기울어짐이 비로소 나를 혼자가 아니게 만들기 때문이다. 타인의 중력에 기꺼이 포획된 채, 나는 오늘도 멈추지 않는 마음을 따라 더 깊은 생의 안쪽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