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낙엽
낙엽
바람이 나무를 흔들자,
아슬하게 붙어있던 낙엽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차가운 아스팔트에 내려앉은 낙엽을
누군가는 빗자루를 들고 쓸어 담는다.
내년의 초록빛을 기약하며 떨어진 너희들이
같은 색을 가진 흙더미를 만났다면,
천천히 스며들어 새싹을 키우는
거름이 되었겠지.
소멸이 아닌 순환으로 돌아가는 길,
떨어진 날들이 쌓여가는 동안
우리는 자라고,
다시 초록빛을 맞이한다.
-
가을을 지날 때마다 낙엽을 본다. 나무에서 멀어지는 그 찰나의 낙하가 언제나 쓸쓸한 것만은 아니다. 추락의 결말은 보이는 것보다 입체적이다. 어떤 이에게는 마침표처럼 보이는 추락이, 멀리서 지켜보는 타인에게는 그저 계절이 지나가는 풍경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런 무심한 시선들이 겹겹이 쌓인 바닥에 닿고서야 나는 지난날들을 떠올린다.
그때의 나는 종종 스스로를 바닥에 떨어진 낙엽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쓸모를 다해 버려진 잎처럼 초라해지던 순간들마다 나를 가장 아프게 했던 건 타인들의 찬란한 속도였다. 미용사로 일하던 시절, 내 곁에는 늘 완벽해 보이는 동료가 있었다. 그는 단 한 번의 실수도 허용하지않았고, 매일 아침 누구보다 일찍 출근해 매장의 불을 밝히는 부지런한 삶의 표본이었다.
흔들림 없이 직진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자꾸만 가지에서 밀려나 바닥을 뒹구는 나의 나약함을 탓했다. 나만 멈춰 있는 것 같고, 나만 이 치열한 계절에서 낙오된 낙엽 같다는 열등감이 가시처럼 돋아났다.
모두가 선명한 초록을 고수하는 틈에서, 나 혼자 색을 잃고 바스라지는 것은 내보여서는 안 될 결함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남들보다 먼저 말라가는 것 자체가 이 계절을 등지는 무력함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결국 나는 더 깊은 고립을 자처하며 스스로를 성벽 안에 가두었다.
하지만 끝이라고 믿었던 그 막막한 바닥에서 나를 발견한 건, 나와 닮은 모습으로 이미 그곳에 누워있던 타인들이었다. 내가 그토록 동경하고 질투했던 그 '찬란한 속도'를 내기 위해, 사실 그들 역시 저마다의 잎을 부지런히 떨구며 이곳으로 내려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본다.
완벽해 보이던 동료의 가위질 뒤에 숨겨진 무수한 상처와, 그가 견뎌온 지독한 고립의 시간들 역시 결국은 겹겹이 쌓여 서로의 토양이 되기로 약속한 낙엽의 서사였음을 말이다.
혼자라고 믿었던 바닥이 수많은 낙엽이 겹쳐진 '우리'라는 토양이었다는 것을,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내가 무너져 내린 자리에 아무런 말 없이 다가와 나를 안아주던 한 사람이 있었다. 어떤 화려한 위로나 해답을 건네는 대신, 그저 자신의 온기를 나누며 묵묵히 나를 품어주던 팔의 감촉.
그의 팔이 내 등을 감싸 안는 순간, 소란스러운 세상의 소음이 멎었다. 그것은 마치 수만 장의 낙엽이 겹겹이 쌓여 세상의 모든 소리를 흡수해버린 고요한 지대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옷깃에 닿은 나의 상처가 타인의 온기를 타고 천천히 흩어질 때, 위로는 정답을 건네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함께 길을 잃어주는 일임을 나는 온몸으로 느꼈다.
그의 품은 차가운 아스팔트가 아니라, 서로를 덮어주며 만들어낸 따뜻한 흙더미였다. 홀로 소멸하는 줄 알았는데, 누군가의 개입으로 인해 나는 다른 이의 봄을 밀어 올릴 양분이 되고 있었다. 나의 떨어진 시간들도 결코 허투루 흩어지지 않고, 당신의 날들과 차곡차곡 쌓여 서로를 지탱하는 에너지가 되었다.
회복은 화려하지 않다. 단번에 알아챌 만큼 극적인 변화를 일으키지도 않는다. 그저 소리 없이 서로의 고독에 천천히 스며드는 과정일 뿐이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정적의 시간 동안에도, 바닥에 맞닿은 우리들의 마음은 아주 조금씩 서로를 다시 자라게 하는 동력이 된다.
가을의 끝자락, 바닥에 쌓인 낙엽들처럼 내 안에도, 그리고 당신의 안에도 무수히 쌓여온 날들이 있다. 그날들은 속절없이 흩어지는 줄만 알았는데, 돌아보니 어느 순간부터 서로를 단단하게 지탱해 주는 토양이 되어 있었다.
아스팔트 위의 빗자루 소리는 무심하다. 누군가에게는 쓸모가 다한 것들을 치워내는 소멸의 신호겠지만, 나는 그 소란 속에서 차가운 바닥을 떠나 기어이 흙으로 돌아가려는 몸짓을 읽는다. 빗자루질이라는 소란을 통과해서라도 서로의 온기를 가진 흙더미에 닿을 수 있다면, 그것은 소멸이 아닌 순환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서로의 떨어진 날들이 겹겹이 쌓여가는 동안 우리는 함께 자라고, 다시 각자의 초록빛을 얻는다.
이제는 안다. 홀로는 끝내 틔울 수 없었을 초록의 예감이, 당신이라는 토양 위에서 기어이 눈부신 빛으로 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이제 ‘우리’라는 순환의 약속을 조금 더 믿어보기로 했다. 이제 기꺼이 나의 잎을 떨구어 당신 곁에 눕는다. 우리가 함께 누워있는 자리에, 머지않아 가장 정직한 봄이 찾아올 것을 알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