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것들의 안부

[봄의 감각]

by 김민경



겨울 외투를 벗어던지는 일은 생각보다 경쾌하지 않다. 두터운 모직의 무게가 사라진 어깨 위로 쏟아지는 봄볕은 다정하기보다 낯설고, 옷감 속에 숨겨두었던 살결에 닿는 공기는 여전히 끝이 서늘하다. 세상은 이미 연분홍과 연초록의 색으로 갈아입으며 새 출발을 재촉하지만, 나의 감각은 아직 겨울의 마른 낱장들을 다 넘기지 못한 채 문턱에 걸려 있다.


내가 봄이 왔음을 실감하는 순간은 화려한 꽃의 개화 소식이 아니라, 창틀에 소리 없이 내려앉은 노란 꽃가루를 마주할 때다. 불청객처럼 찾아와 가구의 모서리와 방구석을 점거한 그 노란 먼지들을 젖은 걸레로 닦아내면, 하얀 면 위에 선명한 노란빛이 묻어 나온다. '아, 정말 봄이 왔구나.' 그제야 나는 낮게 읊조린다.


이 먼지를 닦아내는 행위는 단순히 청소가 아니다. 겨우내 무채색의 풍경 속에 섞여 흐릿해졌던 내 곁의 사물들을 하나씩 발굴해 내는 의식에 가깝다. 젖은 걸레가 지나간 자리마다, 그동안 풍경의 일부로 방치되었던 사소한 물건들이 물기를 머금으며 비로소 선명한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손이 가는 것은 책상 위, 연식이 오래된 노트북이다. 팬 돌아가는 소리는 유난히 거칠고, 자판의 글씨 몇 개는 손가락 끝의 마찰을 견디지 못해 희미하게 지워졌다. 사람들은 봄이 오면 낡은 것을 버리고 새것을 들이라 말하지만, 나는 기어코 화면을 밝히는 이 낡은 기계에서 밖의 꽃봉오리보다 더 생생한 맥박을 느낀다.


이 노트북은 내가 통과해 온 수많은 계절의 문장들을 묵묵히 받아내 준 가장 충실한 목격자다. 내가 절망하며 자판을 내리치던 밤과, 한 줄의 진실을 찾기 위해 커서를 깜빡이며 밤을 새우던 새벽을 이 사물은 기억한다. 노트북이 내는 고물거리는 소음은 마치 내게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닳아가는 물건의 시간만큼, 너 또한 삶을 충실히 살아가고 있느냐는 물음말이다. 안타깝게도 아직 나는 그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벗겨진 자판 위에 놓인 손가락이 잠시 머뭇거리지만, 이 망설임이야 말로 내가 이 낡은 기계 앞에서 문장을 멈추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 망설임의 틈새로 들이치는 봄볕은 유난히 선명하다. 그 빛 아래서 채도가 올라 가는 것은 멀리 있는 꽃밭이 아니라, 내 곁에서 함께 낡아간 물건들의 표정에서 먼저 시작된다. 평소 관심 없던 컵의 이 빠진 자국, 책장에 꽂힌 오래된 책의 해진 표지 같은 것들이 봄볕 아래서 유난히 도드라진다. 사물은 제자리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존재다. 그들이 우리를 지켜보는 시간만큼, 우리의 세월도 사물에 고스란히 담긴다.


물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사물과 나 사이에 흐른 시간의 밀도를 존중하는 일에 가깝다. 세상은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하거나 효율이 떨어진 물건을 향해 '바꿔야 할 때'라고 말한다. 삐걱거리고 속도가 더딘 것을 '망가졌다'라고 정의하며 폐기를 권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제 속도로 숨 쉬고 있는 이 낡은 것들을 긍정하려 한다. 이것은 고집이라기보다, 낡았으나 여전히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 나의 지나온 삶의 흔적을 인정하는 힘이다.


내 안의 흉터와 상처들을 대하는 방식도 이와 다르지 않다. 외면하고 싶었던 마음의 구석진 곳까지 조심스럽게 눈을 맞추되, 그 끝에서 마주한 못난 조각들을 '쓸모없는 것'이라며 던져버리지 않는 것. 낡은 노트북이 여전히 문장을 띄워 올리듯, 나의 흉터 또한 나를 지탱하는 필연적인 부속품임을 인정하는 것. 이 봄에 내가 사물들로부터 배우는 것은 바로 제 자리를 지키는 것들의 단단함이다.


겨울의 '자기 구원'이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고, 가을의 '타인'이 관계의 거리감을 익히는 과정이었다면, 이제 맞이하는 봄은 내 곁에 남은 '물건'들을 통해 존재의 경계를 확인하는 시간이다. 낡은 노트북의 거친 소음과 창틀의 노란 꽃가루, 그리고 곧 이야기할 반려견의 털 뭉치와 부모님의 안경 같은 것들이다. 이 사소하고 따뜻한 충전재들이 내 삶의 비어있는 구멍뿐만 아니라, 서로를 지탱하며 생겨난 틈새까지 메울 것이다.


오늘 내가 선택한 이 낡은 물건들과 서툰 걸음이 가장 정확한 정답이라고 믿는다. 이제 나는 이 계절이 허락한 채도 높은 기억들을 하나씩 기록하려 한다.


봄이라고 하기엔 아직은 차가운 바람이 뺨을 만진다. 그 감촉을 느끼며, 이제야 봄이 시작되었음을 느낀다. 제자리에서 나를 지켜봐 주던 물건들에게 이제 내가 응답할 차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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