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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혁 May 05. 2020

시작은 그냥 구렁이 담 넘어가듯

시작의 설렘, 그딴 거 개나 줘 버려

이력서를 넣었다. 긴장의 꽃망울이 피어나면서 몇 날 며칠을 휴대폰 전원 버튼이 망가지도록 하루에도 수십 번씩 놓친 문자가 없는지 문자사서함을 뒤진다. 포기하다시피 한 축 처진 무거운 어깨로 맛없는 점심을 먹고 있을 때 문자 하나가 도착한다. "서류전형에 합격했습니다. 00 날까지 00으로 면접 보러 오세요." 문자를 보는 순간 한 톨 한 톨 세어가며 먹던 밥은 채 1분이 되지 않아 깨끗이 비워졌다. 분명히 먹구름이 잔뜩 낀 흐린 날이었데도 하늘에선 꽃비가 내렸다. 자신 있고 당당한 몸과 마음으로 면접을 보고 난 후 만족스러운 느낌으로 두 손 모아 합격을 기다리는 조마조마한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토록 간절히 바랐던 시작을 향한 염원은 가슴 벅찬 붉은 태양을 맞이할 수 있는 첫 출근이라는 선물을 가져다주었다. 그 어느 때보다 몇 배로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심호흡을 몇 번이나 하고 문밖을 나섰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렇게 섬광처럼 지나간 하루는 몸과 마음이 너무나 고된 행복의 날이었다. 잠도 언제 어떻게 들었는지 모를 사이 또다시 아침이 되고 두 번째 출근 날이 된다. 역시나 시간은 너무나 빠르게 지나가고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주말을 맞이한다. 한숨을 돌릴 수 있는 휴일을 맞이하여 정신을 차리면서 또다시 다짐을 한다. “하늘이 주신 기회이니만큼 멋진 시작으로 창대한 꿈을 이루리라고”


사회생활은 누구나 거의 비슷할 것이다. 설렘으로 시작된 낯선 장소와 새로운 사람들, 내 것인지 아닌지, 나와 맞는지 안 맞는지를 빠르게 판단하고 받아들여야만 꿈꿨던 나의 모습이 꽃망울을 피울 수 있는 곳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말이 쉽지 1주일, 2주일, 한 달, 두 달이 지나도 여기가 어디고 나는 누구인지를 망각한 채 숨 쉬고 사는 영혼들은 많다. 아마도 부푼 가슴을 안고 시작된 그날의 여운이 가시지를 않은 건 아닐까? 누구에게나 흔한 일상이 각자에겐 특별한 날이기에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가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심어져 있으니 특별한 사람들 속에서의 괴리감이 나도 모르게 싹트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특별하게 시작된 매 순간은 특별하지 않은 끝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먼지 되어 희미하게 사라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도 슬프거나 불행하진 않다. 끝이라 여기는   다른 시작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니까.


희미하게 먼지 되어 사라지는 `끝`으로 인해 조금씩 느끼는 것들이 있었다. 모든 새로운 것을 시작이라 칭하지 않고 `했었던`, `해왔던`, `하고 있었던`,으로 좀 더 편안하게 일상을 대하기로 한 마음이다. 가슴 터질 것 같던 첫 경험의 시작은 지우고 싶은 끝으로 막을 내렸지만 쌓이고 퇴적되는 수많은 시작들로 인해 삶과 사회의 걸쭉한 기운을 받아 융통성을 배우고 얻었다. 그로 인해 시작의 설렘은 줄어들었고 칼날 같은 무시무시한 출발선상의 긴장과 두려움도 함께 줄어들어 그리 눈부시지 않은 평온하고 잔잔한 따사로운 햇살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삶의 매 순간을 구분하고 경계 지은다면 기다리는 행복이 오지 않을 때의 걱정, 이 행복이 언제쯤 끝날 것인지의 초조함, 슬픔과 고통의 시간이 끝나지 않으면 어쩌지의 불안함, 괴로움의 끝을 알고 싶지만 알 수가 없는 암흑 같은 현실이 그냥 삶 자체가 되는 지옥이 될 수도 있다.

`시작`이라는 단어 때문에 시작을 못하는 수많은 이들에게 한때 만신창이가 된 얼굴로 거울을 보며 나 자신에게 했던 말을 해주고 싶다. 시작은 아무것도 기억 안 나는 막 태어났을 때의 순간만 어렴풋이 떠올려보자. 그 이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나는 시작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 내 삶에 하나씩 주어지는 것들을 정성 들여 열심히 받고 있는 것뿐이라고. 원래부터 내 것인 것들이기에 긴장도, 두려움도 없을 테니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아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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