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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하 Dec 21. 2016

냉정과 열정 사이, 피렌체

오직 '그 두오모'를 보기 위해 갔던 도시

여섯 번째 도시, 피렌체


내가 피렌체에 가고 싶었던 이유는 오로지 두오모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에 나왔던 그 두오모. <냉정과 열정 사이>의 두 주인공, 쥰세이와 아오이가 스치고 스치다가 결국은 만났던 그 도시, 피렌체. 영화 속에 나오는 골목 이곳저곳도 예뻤지만 쥰세이가 피렌체를 내려다보던 그 주황색 돔, 그리고 쥰세이와 아오이가 만났던 그 광장을 잊을 수 없었다. 영화 음악과 분위기 덕분에 피렌체는 언젠가부터 내게 어마어마한 낭만의 도시로 자리 잡았다.


실제로 만난 7월의 피렌체는, 아주 많이 너무 많이 진짜 정말 정말 많이 더웠다. 햇살은 뜨겁고, 드물게 불어오는 바람조차 건조했다. 낭만이고 뭐고, 나갔다간 죽겠다 싶어 아침에 나가 한낮이 되기 전, 젤라또를 하나씩 물고 숙소로 돌아와 낮잠을 잤다. 낮잠이 지겨워지면 가까운 마트 conad에 가서 신기한 파스타와 이태리식 절임 반찬을 구경했다. 엄청난 종류의 싱싱한 치즈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귀여운 이탈리아 반찬들


하지만 그렇게 견딜 수 없을 만큼 뜨거워도 이 도시에 온 이유, 두오모는 보러 가야 했다. 사실 두오모는 이탈리아에서는 도시를 대표하는 성당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돔(dome), 그러니까 둥근 지붕 양식은 쿠폴라라고 부른다고. 피렌체에도 두오모가 있고 밀라노에도 두오모가 있다는 사실을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야 알았다. 난 영화 속 바로 그 두오모 이름이 두오모인 줄 알았지. 


피렌체 두오모의 정식 이름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그 빨갛고 둥근 지붕이 있는 성당이다. 대성당의 쿠폴라에 직접 올라갈 수도 있지만, 바로 옆에 있는 조토의 종탑에 올라가 쿠폴라를 구경할 수도 있다. 나는 빨갛고 둥근 돔이 있는 피렌체 전경을 보고 싶었기에 조토의 종탑에 올라가기로 했다. 


좁고 어두운 계단을 끊임없이 걸어 올라갔다. 올라갈수록 계단은 더욱더 좁아지고, 내려오는 사람을 만나면 벽에 몸을 붙이다시피 해야 했다. 좁은 종탑 안의 공기는 바깥보다 높아서, 땀은 나는 수준이 아니라 빨래 짜이듯 뚝뚝 떨어졌다. 아무리 올라도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떠나기 전에는 이곳을 오르면서 냉정과 열정 사이의 한 장면이나 연극 유럽블로그에서 두오모 성당을 오르며 되뇌는 독백을 떠올릴 수 있을 줄 알았지만, 현실은 여기가 피렌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머리가 하얗게 되어서 그냥 오르고 올랐다. 냉정과 열정 사이 테마곡도 핸드폰에 담아 갔건만 들을 생각도 못하고 겨우겨우 정상에 올라서도 텅 비어버린 머리로 피렌체를 그저 내려다보기만 했다. 


내가 상상하고 그리던 그, 피렌체


가장 기억나는 건 종탑에서 내려다보는 두오모의 주황색 지붕과 그 꼭대기에 서있는 작은 사람들, 선글라스를 끼고도 아득할 만큼 눈이 부셨던 이탈리아의 태양. 


지금 생각하면 그때 냉정과 열정 사이 테마곡을 듣지 않았던 게, 유럽블로그의 어떤 장면들도 떠올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덕분에 남의 양념 없이 그때 그 풍경, 빛, 느낌이 왠지 그대로 내 것으로 남은 기분이 든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과 옷, 겨우겨우 눈을 뜨고 찍었던 몇 장의 셀카, 파랗다 못해 하얗기까지 하던 하늘과 넓고 건조하고 덥고 온통 주황색이던 피렌체. 


이 사진은 조토의 종탑이 아니라 우피치 미술관에서 찍었다. 봐도 봐도 좋았던 두오모.


우피치 미술관에도 갔었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우피치에서 바라본 두오모와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딱히 평소에 좋아하는 그림은 아니었지만 한참을 보다가 돌아왔다. 공부를 조금 하고 갔더라면 더 좋았을까? 우피치 미술관이 담고 있는 엄청난 세월과 그 세월에도 이렇게나 작품들이 보존이 잘 되어있다는 것에는 감탄했지만, 대부분 성경의 내용을 담은 종교화라 그랬는지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대작들을 뒤로하고 나와서, 나는 미술관 앞 화가에게 그림을 하나 샀다. 마음에 쏙 드는 두오모 그림이었다. 괜히 내 이름을 남기고 싶어서 화가에게 내 이름 스펠링을 적어달라고 부탁했다. 또박또박 MINHA를 불렀는데, 아저씨는 Mil...까지 일필휘지로 새로운 이름을 적어버렸다. 내가 급히 N! H!라고 정정하자 아저씨는 당황해하며 글자를 뭉개 보았지만 이내 씩 웃으면서 대충 마무리했다. 


- 너 이름 Milena 해. 이 이름 되게 좋은 이름이야. 너랑도 잘 어울리고. 


능청스럽고 웃기는 이탈리아노 같으니.



뭐, 그렇게 그림도 얻고 예쁜 영어 이름도 얻었다는 이야기. 찾아보니 카프카의 연인도 밀레나였고 밀라 쿠니스도 이 milena라고 해서 더욱 마음에 들었다. 그림도 물론, 아직까지도 마음에 든다. 




피렌체에서는 3일을 꽉 채워 머물렀다. 덕분에 더울 땐 늘어져 낮잠을 자고, 따박따박 젤라또 타임도 지키고, 여유 있게 동네 산책도 할 수 있었다. 오며 가며 매일 보는 두오모도 좋았고 숙소 앞 다리에서 바라보는 베키오 다리도 좋았다. 해 지는 피렌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미켈란젤로 언덕도 피렌체에서 참 좋아하던 곳이다.



이탈리아의 태양은 '해'보다는 '태양'이 훨씬 잘 어울린다. 태양이 질 때 도시는 온통 지붕보다 더 붉은색으로 물들고 언덕에 선 우리는 얼굴과 온몸으로 그 빛을 받아냈다. 빨간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넘어간 후에는 분홍색과 남색이 뒤섞인 하늘과 밤에도 주황색으로 빛나는 피렌체가 장관을 만들어냈다. 언덕 위 광장에서는 가수가 노래를 불렀고 나는 연신 감탄하며 눈과 카메라를 번갈아 들이댔다.








아름다운 피렌체 야경



한참을 바라보다가 다시 언덕을 걸어 내려왔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카페에서 어떤 밴드가 비틀스의 across the universe를 연주하고 있었다. 약간 서늘한 바람, 방금 봤던 아름다운 야경, 갑자기 들리는 좋아하는 노래. 너무나 완벽한 밤이었다.




정말 너무 더워 여름엔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았는데..... 그때의 행복했던 기분을 떠올리자 한낮의 피렌체도 괜찮으니 그저 다시 가고만 싶다. 영화를 보며 꿈꾼 것처럼 낭만적이지 않았지만 모든 기대를 던져버리게 한 뒤 예상치 못한 낭만을 훅훅 던져준 도시, 피렌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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