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계산 잘못해서 하루 날려먹음
여행 루트를 짜는 건 너무 즐겁지만 또 너무 귀찮은 일이었다. 빠르게 지나는 여행보단 며칠이라도 머무는 여행을 하고 싶은데 가고 싶은 곳은 많았고 또 돈은 없었다. 적당히 머물고 적당히 가는 (내게) 최적의 루트를 찾아야 했다.
고심 끝에 정한 루트는 부다페스트-프라하-체스키크롬로프-잘츠부르크-베네치아-피렌체-아씨시-세비야-론다-바르셀로나-몽펠리에-아비뇽-파리. 28박 13개 도시. 유럽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크게 가로지르는 웃기는 루트였다.
부다페스트는 첫 도시였다. 글루미 선데이, 차가운 동유럽의 분위기, 굴라쉬, 유럽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야경을 기대했다. 그중 가장 기대했던 건 역시 야경. 이 야경을 찍기 위해 삼각대를 들고 가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결과적으론 들고 다닐 자신이 없어 포기했고, 정말 잘 한 선택이었지만.
부다페스트에서 이틀, 하룻밤 자고 이튿날 프라하로 가는 야간열차를 탈 계획이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출발하기 며칠 전에야 등골 오싹한 실수를 발견했다. 출발 날짜만 보고 시간을 제대로 안 봤던 거다. 내 비행기는 22일 출발이었지만, 밤 11시 50분 출발이었다. 그러니까 실은 23일 출발인건데 23일에 부다페스트 첫날 일정을 넣어버린 거다.
멘붕. 잠깐, 그럼 부다페스트에 도착한 날 바로 프라하로 떠나야 하는 거네? 이후 일정은 어떻게 되는 거지? 부다 숙박은 취소해야 하고? 그럼 야경은..?
부다-프라하 야간열차는 당시 헝가리 철도청 문제로 온라인 예매가 안 돼서 현지 한인민박에 예대 대행을 맡겼었다. 실물 티켓을 미리 사둔 거라 교환이 되는지도 모르겠고, 교환해서 하루 미루면 다음 일정들도 하루씩 밀리는데 중간에 저가 항공을 예매해둬서 일정을 미루거나 바꿀 수가 없었다.
다행히 부다페스트 숙박은 부킹닷컴 취소 가능한 숙소로 잡아뒀다. (부킹닷컴 증말 만세다)
그러니 부다페스트를 그냥 버리는 수밖에. 두바이 경유해서 날아왔는데 부다페스트까지 경유하게 된 셈이다. 가장 기대했던 야경은 당연히 안녕...
숙소를 취소해서 짐 맡길 곳도 없어 캐리어를 끌고 다녀야 하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야간열차 구매대행 해준 한인민박에서 고맙게도 잠시만 캐리어를 맡아주기로 했다. 야경이 유명한 부다페스트에 낮에 도착해서 밤에 떠나는 여행객이라니, 쟨 대체 뭘까 싶었겠지.
이왕 이렇게 된 거 몇 시간이라도 둘러보고 굴라쉬나 먹고 가야겠다 싶었다. 그런데 부다페스트는 내게 음울한 분위기라도 꼭 보여주고 싶었는지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두꺼운 옷은 죄다 캐리어 안에 있는데 온도가 급격하게 떨어졌다. 그야말로 글루미 글루미 부다페스트.
덜덜 떨면서 열심히도 걸어 다녔다. 여행 첫날부터 우울해지긴 싫어서 일부러 활기차게. 그런데 핸드폰 데이터도 없고 지도도 제대로 준비를 안 해서 어디 갈지, 여기가 어딘지도 잘 모르는 상태에, 배도 고프고 춥고... 점점 지쳐갔고 점점 더 우울해졌다.
회색빛 도시, 춥고 비바람이 불던 부다페스트. 사람들마저도 내게 딱딱거리기만 했다. 길을 물어봐도 무시하고 지나가기 일쑤에 나름 맛집이라고 해서 찾아간 가게 종업원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대충 굴라쉬와 고기 메뉴를 시키고 기다리는데 들어온 한국인 여행객 네 명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리고 쑥덕거렸다.
심지어 나온 음식은 아무리 긍정적으로 먹어보려 해도, 너무 짰다. 아 이런.
지금 생각해보면 내 표정과 몰골이 말이 아니어서 쳐다봤나 싶다. 내가 한없이 우울하고 위축되어 있으니까 사람들 태도를 과장해서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땐 그게 얼마나 서럽고 또 얼마나 집에 가고 싶던지.
야간열차를 기다리러 역에 갔을 땐 더했다. 기차역은 으레 그러기 마련인데, 노숙자들이 계속 말을 걸어왔다. 그냥 아무 말이나 하는 것 같았는데 나는 손에 피도 안 통할 정도로 캐리어를 꽉 붙잡고 어깨를 긴장시키고 있었다. 처음으로 혼자 하는 여행이 조금 무서워졌던 것 같다.
간신히 와이파이를 잡아 그때 파리에 있던 애인과 보이스톡을 했을 땐 그냥 울어버렸다. 정말 집에 갈 것도 아니었고 지금 당장 배고프고 추워서 마음이 약해진 걸 알지만, 집에 가고 싶다고 여기 너무 무섭다고 설움을 쏟아냈다. 지금 생각하면 바보 같지만...
한바탕 감정을 풀어내고 나니 기분은 훨씬 가뿐해졌다. 바나나를 하나 사 먹고 역무원에게 물어물어 야간열차를 탔다. 야간열차는 꼭 해리포터에 나오는 호그와트 급행열차처럼 생겼다. 좁은 복도가 있고 옆으로 작은 방들이 붙어있었다. 같은 방을 쓰는 한국인 언니를 만나자마자 무서웠던 마음은 싹 사라졌다. 어찌나 반갑던지. 내 윗칸을 쓰던 시끄러울 정도로 발랄한 조지아 여자애는 분위기를 방방 띄워놓았다. 한국인 언니는 쟤 너무 시끄럽다며 인상을 찌푸렸고 나는 웃었다.
짐을 묶어두고 이불을 펴고 눕자 우습게도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덜컹거리는 기차에 누워 창 밖을 바라봤다. 홱홱 지나가는 나무들, 어슴푸레한 달빛, 어둑한 침대칸. 전부 마음에 들었다. 부다-프라하 야간열차는 좁고 지저분하고 불쾌하기로 유명하다던데 좁은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면서도 즐거웠다. 걱정했던 베드버그도 없던걸.
쉽게 지치고 우울해지지만, 또 이렇게 쉽게 다시 설렌다.
설레는 마음으로 잠들었다 깨니, 체코의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경유지가 되어버린 부다페스트, 이번엔 이렇게 안녕. 다음에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만날 수 있길. 그땐 음울한 도시 말고 다른 이미지로 기억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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