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슬픔을 대신 짊어지기엔

by 공작

"너네 아빠 술 좀 그만 마시라고 말 좀 해”


어릴 적, 엄마는 늘 같은 말을 반복했다. “너네 아빠 술 좀 그만 마시라 그래.” 그때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아빠의 술이 내 일은 아니었지만, 엄마는 꼭 나를 거쳐야만 아빠에게 말을 전했다. “팔짱이라도 끼고, 애교 좀 부리면서 말해봐. 그럼 듣지 않겠니?” 엄마의 말에 의하면 아빠가 술을 마시는 건 내 탓이기도 했다. 아빠가 아끼는 딸이 말리지 않아서.

엄마는 바보 같았다. 아빠가 술 마시는 건 나 때문이 아니었다. 그러니 내가 말린다 한들 나는 애교를 부릴 줄 몰랐고, 아빠 앞에만 서면 목소리가 안 나왔다.


엄마는 한숨을 쉬며 “가시네가 왜 그렇게 주변머리가 없어.” 하고 내뱉었다. 그 말이 억울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시절의 나는 엄마의 기대를 짊어진 작은 다리 같았다. 두 사람 사이의 말을 전하고, 감정을 받쳐야 하는 다리. 언제 무너질지 모르면서도 조용히 버티는 다리.


아빠는 매일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하면 목소리가 커졌고, 엄마는 내 탓을 했다. 나는 귀를 막았다. 그건 귀를 막는 게 아니라 마음을 막는 일이었다. 이불속에서 두 사람의 싸움이 멈추길 빌었다. 세상이 잠잠해지면, 다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다음 날, 식탁 위엔 또 소주병이 놓여 있었다.


“너희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도망갔어.”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이 푸념인지 진심인지 몰랐지만, 그 무게는 내 어깨를 짓눌렀다. 아빠가 술 마시는 것도, 엄마가 새 삶을 살지 못하는 것도 내 탓이었다. 나는 도망칠 수 없었고, 엄마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미움은 엄마를 위한 방패였던 것 같다. 엄마의 아픔이 내 안으로 스며들 때, 나는 누군가를 탓해야 했다. 엄마말만 들으면 아빠는 아주 나쁜 사람이었다. 아빠를 미워하면서 엄마를 지키고 싶었다. 고작 14살이 그 짐을 짊어지기엔 너무 무거웠다.


엄마의 키를 넘어서면서, 나는 더 이상 엄마에게 휘둘리지 않았다. "그냥 이혼해!"라며 엄마에게 맞섰다.


살면서 저절로 알게 되는 것들도 있겠지만 나는 성장하며 배우며, 책을 통해서 나를 지키는 법을 배웠다.

책은 나를 가르치고, 다독이고, 나를 단단하게 했다.


미움을 탓하지 않는다. 그건 살아남기 위한 방식이었을 뿐,

어쩌면,

우리 모두는 각자의 미움으로

사랑을 지키려 애쓰는 존재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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