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숲의 온기에 몸을 맡긴 선영은 깊이 가라앉았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바람 소리마저 부드러운 물결처럼 출렁였다.
그 물결 속에서, 어디선가 낮고 묵직한 울음이 울려 퍼졌다.
“야아아옹―.”
소리는 처음엔 멀리서 들리다가, 점점 가까워졌다.
선영은 눈을 뜨려 했지만, 눈꺼풀은 납처럼 무거웠다.
대신 시야에 서서히 한 형체가 떠올랐다.
그것은, 검은 그림자였다.
칠흑처럼 어두운 털, 달빛을 머금은 듯 번쩍이는 노란 눈동자.
눈 속에는 끝없이 깊은 구렁과도 같은 무언가가 있었다.
검은 고양이는 선영 주위를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발걸음은 소리 없이 부드러웠지만, 그 기척은 숨을 죄어왔다.
“박선영…”
그 목소리는 울음과 말이 뒤섞인 듯 낮고 서늘했다.
“네가 이 자리에 있는 건 우연이 아니다.”
선영은 꿈속에서도 반발심이 솟구쳤다.
“이게 무슨 장난이야? 왜 나한테 이런 일을―”
“조용히 들어.”
검은 고양이의 눈빛이 번뜩였다.
“네가 인간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세 가지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시험…?”
“첫째, 지켜라.
둘째, 갚아라.
셋째, 버려라.”
그 의미를 묻기도 전에, 검은 고양이는 발걸음을 멈추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남은 건 그 노란 눈빛이 남긴 잔상과,
멀리서 다시 들려오는 불길한 울음뿐이었다.
“야아아옹―.”
그 울음소리에 선영은 눈을 번쩍 떴다.
풀숲 위로 아침 햇살이 번지고 있었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는 아직도 그 목소리의 메아리가 가시지 않았다.
아침 햇살이 풀잎 끝에 맺힌 이슬을 반짝이게 했다.
새끼 고양이들은 아직 졸린 듯, 서로의 몸에 얼굴을 묻고 꼼지락거렸다.
선영은 잠시 그 평화로운 광경을 바라보다, 꿈속 검은 고양이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첫째, 지켜라.’
그 순간, 풀숲 너머에서 낯선 인기척이 스쳤다.
부스럭, 부스럭—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 곧, 그림자가 풀 위로 길게 드리워졌다.
허름한 차림의 중년 남자였다.
손에는 커다란 포대자루가 들려 있었고, 시선은 곧장 새끼 고양이들에게 꽂혀 있었다.
“어이구, 오늘은 새끼가 많네. 이놈들은 금방 돈 되겠는데.”
그의 입가가 비죽 올라갔다.
선영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본능이 귀를 세우고, 꼬리를 부풀리게 했다.
발끝이 땅을 움켜쥐었고,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낮고 길게 ‘시이익―’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포대자루가 점점 새끼 고양이들 위로 드리워졌다.
그 순간, 선영의 머릿속에 검은 고양이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렸다.
“지켜라. 네가 선택하지 않으면, 아무도 이 아이들을 대신 지켜주지 않는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선영은 날카롭게 울었다.
“야아아옹!!!”
온몸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이번에는 도망이 아니라, 공격이었다.
남자의 포대자루가 공중에서 휘둘리려는 순간,
선영은 번개처럼 풀숲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햇살 속에서 번뜩인 발톱이 남자의 손등을 스쳤다.
“악!”
남자가 고통에 손을 놓는 사이, 포대자루가 풀밭에 떨어졌다.
선영은 포대자루 위로 날렵하게 착지해 몸을 부풀리고 이빨을 드러냈다.
등줄기는 활처럼 휘어 있었고, 꼬리는 굵게 부풀어 하늘을 찔렀다.
남자가 욕을 내뱉으며 발로 차올리려 했지만,
선영은 재빨리 옆으로 구르듯 빠져나와 다시 그의 발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날카로운 발톱이 바짓가랑이를 찢고, 발목을 스쳤다.
남자가 비틀거리는 순간, 까치들이 어디선가 날아와 남자의 머리 위를 맴돌며 날개짓을 했다.
마치 오늘만큼은 고양이 편을 들어주겠다는 듯했다.
새끼 고양이들은 겁에 질려 웅크리고 있었지만,
선영은 뒤로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의 몸은 계속 앞으로, 더 거칠고 빠르게 움직였다.
남자가 다시 손을 뻗자, 이번엔 송곳니가 번쩍였다.
남자의 손목 바로 앞에서 바짝 멈춰, 으르렁대는 숨소리를 들려줬다.
짧고도 강한 경고였다.
남자는 결국 욕을 퍼붓고 뒷걸음질쳤다.
“재수 없는 고양이…!”
그는 포대자루를 주워 들지도 못한 채, 허둥지둥 숲길을 빠져나갔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선영은 그 자리에 서서 한동안 귀를 곤두세웠다.
더 이상 위협이 느껴지지 않자, 천천히 새끼 고양이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작은 녀석들이 겁에 질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영은 부드럽게 그들 곁에 몸을 눕혔다.
몸속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뜨거움이 올라왔다.
그건 단순히 싸움에서 이겨서 느끼는 쾌감이 아니었다.
‘내가… 누군가를 지켰다.’
이 감각은 인간일 때는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멀리서, 검은 고양이의 노란 눈동자가 반짝였다.
바람결에 그 목소리가 스쳤다.
“첫 번째 시험… 통과다.”
새끼 고양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잠에 들 무렵,
숲 끝에서 부드럽게 흔들리는 그림자가 다가왔다.
달빛이 비추자, 검은 고양이의 형체가 또렷해졌다.
“첫 번째 시험, 잘했다.”
그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서늘했지만, 어딘가 묘하게 인정하는 기색이 섞여 있었다.
“이제 두 번째다.”
검은 고양이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선영 주위를 돌았다.
“갚아라.”
“갚으라니, 뭘?”
선영이 눈을 가늘게 뜨자, 노란 눈동자가 살짝 빛났다.
“네가 빼앗은 것. 네가 무너뜨린 것. 네가 외면한 것… 그걸 되돌려라.”
검은 고양이의 목소리가 바람결에 길게 흩어졌다.
“그 중에서도, 오늘 밤 네가 마주하게 될 사람은… 너 때문에 가장 큰 것을 잃은 자다.”
그 말이 끝나자, 숲이 스르르 뒤집히듯 변했다.
풀잎과 나무는 사라지고, 눈앞에 작은 교무실 풍경이 나타났다.
책상 위에는 오래된 머그잔, 그리고 사진 한 장.
사진 속에는, 자신이 하루아침에 잘라낸 계약직 교사 ‘김민지’가 웃고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짐을 정리하는 김민지였다.
그녀의 손끝이 떨렸고, 표정에는 깊은 상실감이 묻어 있었다.
검은 고양이의 목소리가 다시 속삭였다.
“김민지에게, 네가 빼앗은 걸 돌려줘라.
하지만 고양이의 몸으로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만 가능하다.”
선영은 숨을 삼켰다.
이번 시험은 싸움이 아니라… 진짜 ‘속죄’였다.
교무실 한켠, 상자에 교재와 필기구를 차곡차곡 담는 김민지의 손길이 느리게 떨렸다.
그 손끝에는 체념과 서글픔이 묻어 있었다.
창문 틈으로 스며든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선영은 문밖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발톱을 움켜쥐듯 세웠다.
‘저게… 내가 만든 결과구나.’
“다시 기회가 온다면…” 꿈속에서 했던 그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 순간, 그녀의 시야 끝에 한 남자가 비쳤다.
교장실에서 종종 보았던, 사립학교 납품업체 대표.
그는 손에 서류봉투를 들고 교무실을 기웃거리더니, 김민지의 자리를 향해 다가갔다.
“김 선생, 나한테 자료 좀 남겨놓은 거 있죠?”
목소리에는 은근한 압박이 섞여 있었다.
김민지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교장 선생님께 직접 물어보셔야…”
남자의 표정이 굳었다.
“이봐요, 그럼 선생님 학교 생활 힘들어질 수 있어요.”
선영의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쳤다.
그녀는 교무실 문틈으로 몸을 날렸다.
탁! 서류봉투를 들고 있는 남자의 손등에 발톱이 스쳤다.
놀란 남자가 봉투를 떨어뜨리자, 안에 든 계약서와 뇌물 내역이 바닥에 흩어졌다.
“이… 이놈의 고양이가!”
그가 발로 차올리려는 순간, 선영은 의자 위로 뛰어올라 커튼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타이밍을 재어, 그가 허리를 굽힌 찰나 다시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봉투 속 문서를 한 장 물고 창문 쪽으로 향했다.
남자는 소리쳤다.
“잡아! 잡아!”
김민지는 얼떨결에 떨어진 나머지 문서를 집어 들었다.
그 순간, 그녀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건… 학교 납품 비리 내역?’
그녀는 빠르게 서류를 가방 안에 숨겼다.
창밖에서는 선영이 문서를 물고 학교 뒤편 숲으로 달아나는 모습이 보였다.
남자는 끝내 따라가지 못했다.
그가 숨을 헐떡이며 교무실로 돌아왔을 땐, 김민지는 이미 평정심을 되찾은 얼굴로 상자를 닫고 있었다.
숲속에서 선영은 문서를 내려놓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발바닥이 욱신거렸지만, 가슴 깊은 곳이 묘하게 시원했다.
‘이제… 조금은 갚은 건가.’
그때, 풀숲 사이로 검은 고양이가 나타났다.
노란 눈동자가 희미하게 빛나며 말했다.
“두 번째 시험… 통과다.”
숲속에 남은 고요를 깨고, 검은 고양이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마지막 시험이다.”
선영은 이미 숨을 고르며 대답할 준비를 했다.
“이번엔 뭘 하면 돼?”
“버려라.”
짧은 한 마디에 선영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
“뭘 버리란 거야?”
검은 고양이는 한쪽 발을 들어 풀숲 너머를 가리켰다.
그 시선 끝에, 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이 놓여 있었다.
붉은 스포츠카의 스마트키였다.
그 옆에는 명품 시계와, 집 열쇠.
선영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저건… 모든 것이 무너지기 전, 그녀의 세계 그 자체였다.
피아노보다, 명예보다, 심지어 사람보다 더 붙잡고 있던 것들.
“저걸 버려?”
목소리에는 의심과 경계, 그리고 집착이 한꺼번에 섞여 있었다.
검은 고양이의 눈빛이 차갑게 번쩍였다.
“네가 놓지 않으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
그리고 네가 그걸 쥔 채 돌아간다면… 너는 예전의 네 자신으로 돌아갈 뿐이다.”
선영은 키를 바라봤다.
손끝이 아니라 발끝이 떨렸다.
그 순간, 붉은 차를 타고 여유롭게 주차장을 가로지르던 자신의 모습,
학생과 교사들이 부러운 눈길을 보내던 장면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기억 위로, 다른 장면들이 잇달아 스쳤다.
굽은 허리의 경비, 억눌린 표정의 장은희, 계약서를 정리하던 김민지,
그리고 숲속에서 그녀에게 몸을 기대던 새끼 고양이들.
‘이걸 쥐면… 나는 그대로 돌아갈 거야.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
심장이 두근거렸다.
눈을 질끈 감은 채, 선영은 발끝로 키를 툭 밀었다.
찰칵―.
열쇠는 작은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지더니, 바람 속으로 사라졌다.
그 순간, 몸속 어딘가에서 무거운 사슬이 풀리는 듯한 해방감이 스쳤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검은 고양이가 조용히 다가왔다.
“세 번째 시험… 통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