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만에 벌어진 일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불과 몇 시간 전, 햇살이 비치는 거실 창가에서, 광택 나는 그랜드피아노 앞에 앉아 손끝으로 쇼팽을 연주하던 자신이었다.
잔잔한 커피 향이 피아노 위를 맴돌고, 손목에 걸린 명품 시계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던 그 순간까지도, 세상은 완벽했다.
그런데 지금―
언덕 밑, 억새풀 속에서 흙먼지와 땀 냄새를 뒤집어쓴 채 숨죽여 벌벌 떨고 있다.
등 뒤로는 들개의 거친 숨소리와 발소리가, 사냥감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요하게 맴돈다.
윤기 나던 머리카락은 먼지와 풀잎 조각에 뒤엉켜 거칠게 뻗었고,
관리비만 매달 수십만 원이 들던 럭셔리 하우스도,
아침마다 문 앞에서 빛나던 붉은 스포츠카도,
벽장 가득 가지런히 서 있던 명품백과 구두도…
모두 손에서 미끄러져 나가 버린 듯 멀어졌다.
그 모든 것을 단 하루, 아니 몇 시간 만에 잃을 거라고,
누가, 어떻게 상상할 수 있었을까.
아무리 누군가 미리 경고했더라도, 그땐 웃어넘겼을 것이다.
자신이 이렇게 초라하고 무력해질 날이 올 거라고는 단 한순간도 믿지 않았으니까.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눈물이… 난다…’
그러나 고양이의 눈에서는 사람처럼 눈물이 흘러내리지 않았다.
그것마저, 잃어버린 듯했다.
그때였다.
바람결에 실려 온 목소리가 귀끝을 스쳤다.
부드럽고, 낮지만 온기가 배어 있는 소리.
어디서 많이 들었던, 이상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는 목소리였다.
“아이고, 아직 엄마 안 왔구나. 이거 먹자~”
선영은 본능적으로 귀를 세웠다.
풀잎 사이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자,
작은 비닐봉지를 열고 그릇에 먹을 것을 덜어내는 장은희의 모습이 보였다.
햇빛이 그녀의 옆얼굴을 스치며 부드럽게 빛났다.
그 손길은 마치 오래전부터 이 아이들을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서두르지 않고 차분했다.
손끝에서 묻어나는 온기가 멀리서도 전해졌다.
‘장은희…?’
선영의 가슴이 순간 철렁 내려앉았다.
“장 선생, 나야 나! 박선영 교장!”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에게 닿기만 하면, 모든 오해가 풀릴 것 같았다.
그러나 장은희의 귀에는 그 말이 결코 닿지 않았다.
대신 공기 속을 가른 건, 고양이 목구멍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온
짧고 날카로운 “야옹!” 한 마디뿐이었다.
인간의 언어는, 그 자리에서 산산이 부서져버린 듯했다.
장은희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미소를 띤 채 다가왔다.
“어? 넌 처음 보는구나. 너도 이리 와서 먹어.”
그 목소리에는, 교장일 때 한 번도 자신에게 주지 않았던
따뜻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그 온기가 지금의 선영에게는,
잔혹한 거리감으로만 느껴졌다.
선영은 앞발끝을 꼭 모은 채 망설였다.
그러나 속이 비어 허전한 공복감이 점점 목을 죄어왔다.
오늘 입에 넣은 건, 아침에 승희가 건넨 츄르가 전부였다.
장은희의 목소리조차 이젠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코끝을 스치는 향이 모든 감각을 지배했다.
참치캔이 열리며 퍼져 나온 짭조름하고 고소한 냄새.
바닷바람처럼 엷은 비릿함이 섞였는데, 그마저도 군침을 자극했다.
마치 투명한 손이 머리 뒤를 부드럽게 밀어, 그 냄새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듯했다.
결국, 자존심은 허기 앞에 무너졌다.
천천히, 그러나 피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혀끝이 참치에 닿는 순간―
차갑지만 부드러운 살결이 입 안에서 서서히 풀어졌다.
짭조름한 육즙이 혀를 타고 넘어가자, 목 깊숙이 따뜻함이 스며들며 배 속까지 내려갔다.
그제야 알았다.
하루 종일 얼어붙었던 몸과 마음이, 한 숟갈의 온기에 허물어지고 있다는 것을.
엎드린 채 허겁지겁 삼키는 자신의 꼴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찰나처럼 스쳐갔다.
명품 테이블에 앉아 최고급 요리를 앞에 두던 그때의 자신이 떠올랐다.
그러나 배고픔에 시달린 몸은 더 이상 그런 사치스러운 기억을 참조하지 않았다.
지금 이 한 입, 그것이 전부였다.
“많이 먹어라. 당분간 못 올 것 같아. 아버지가 다치셨거든…”
장은희의 목소리는 바람결에 묻혀 조용히 번져왔다.
그 말투에는 미안함과 걱정이 한 겹씩 포개져 있었다.
선영의 귀가 순간 멎은 듯 조용해졌다.
가슴이 철렁, 깊은 곳까지 내려앉았다.
‘아버지가 다치신 게… 사실이었구나…’
순간, 기억 속에서 그날의 장면이 살아났다.
저녁 무렵, 장은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교장 선생님… 아버지가 다치셔서 오늘은 조금 일찍…”
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신은 날카롭게 잘라버렸다.
“그건 장 선생 사정이지. 내가 시킨 일부터 마무리하고 가요.”
그때의 표정이 떠올랐다.
입꼬리는 차갑게 굳어 있었고, 눈매에는 ‘내가 너를 살린다’는 오만이 서려 있었다.
‘내 덕에 먹고 산다’는 생각을 당연하게 굴리며,
장은희뿐 아니라 수많은 교사들을 몰아붙이던 순간들이 필름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참치 냄새가 여전히 코끝에 남아 있었지만,
그 향이 더 이상 따뜻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목구멍 한가운데에 뜨겁고 무거운 돌덩이가 걸린 듯 숨이 막혔다.
배가 부르자, 허기와 함께 곤두서 있던 신경이 서서히 풀렸다.
차갑게 웅크리고 있던 근육들이 하나둘 힘을 잃었고, 온몸에 묵직한 나른함이 번졌다.
눈꺼풀은 천천히, 그러나 막을 수 없을 만큼 무겁게 내려앉았다.
마지막으로 머릿속을 스친 생각은 단 하나였다.
‘다시… 기회가 온다면…’
그 순간, 주변이 고요해졌다.
풀잎 사이로 스미는 바람, 멀리서 들려오는 까치의 울음, 그리고 가까이서 들려오는 새끼 고양이들의 숨소리.
작고 규칙적인, 마치 풀밭 속 작은 시계가 ‘틱, 톡’ 하고 숨 쉬는 듯한 소리였다.
그 소리에 둘러싸인 채, 선영의 호흡도 점점 맞춰졌다.
짧고 가벼운 숨이 천천히 깊어지고, 몸은 풀숲의 부드러운 온기에 파묻혔다.
따뜻함과 고요가 겹겹이 포개져, 오랜만에 느껴보는 평온이 찾아왔다.
그렇게 선영은, 사납고 차가운 하루의 끝에서 뜻밖의 포근함 속으로,
조용히 가라앉듯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