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생처음 엄마와의 해외여행
우리 잘 해낼 수 있을까?
엄마는 어렸을 때 나를 데리고 다니는 것보다 동생을 데리고 다니는걸 더 좋아했다. 나는 외갓집의 북적북적한 분위기를 좋아했다. " 너는 집에 있어, 동생만 데리고 갈 거야" 라며 어느 순간 나를 밀어냈다. 엄마가 서울에 친척집에 갈 때도 나를 떼어놓고 가려고 했다. 하지만 어린 내가 울며 떼쓰는 바람에 결국 나를 서울에 데리고 갔다. 아빠는 "치킨을 사 줄 테니 같이 집에 있자"라고 했지만, 엄마랑 동생이랑 잠시라도 떨어지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일찍 나가고 늦게 들어오는 아빠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어딘가 멀고 낯설었다. 나와 유대감이 없었다. 엄마가 무서우면서도 엄마 없이는 하루도 버틸 수 없었다. 조용한 시골마을에서 엄마와 나, 동생은 언제나 함께 웃고 노는 친구이기도 했다. 그런 걸 보면 엄마가 날 미워한 건 상황 때문이었지 기본적으로는 엄마도 모성을 가지고 나를 키운 것이다. 그러다가도 나는 늘 죄인 되어야 했다. 고등학생 때 엄마가 운영하는 미용실에 들렀다. "소풍 가는데 가방 하나만 사줘". 엄마는 소리쳤다.
"왜 나한테만 이래! 썩을 년이".......
결국 가방은 사지 못했다. 언젠가는 엄마가 천 원짜리 몇 개가 있는 서랍에서 이천 원을 꺼내서 내게 던졌다. 나는 허리를 숙여 그 돈을 주워서 슈퍼에서 딸기맛 산도를 사 먹었다. 자존심보다 허기가 더 컸던 여고생. 나도 참 철이 없었다. 그리고 늘 그런 식이었다. 엄마는.
아빠는 엄마에게 미용실을 차려주고 생활비는 주지 않았다. 엄마가 나를 욕받이로 삼고 감정쓰레기통으로 삼고, 날 키우는 걸 버거워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까. 그래도 일하고 집에 오면 엄마는 많은 반찬은 아니어도 근처 모래내시장에서 찬거리를 사 와 저녁을 푸짐하게 차려놓았다. 한 달에 몇 번 삼겹살을 구워서 상추쌈을 크게 싸 먹는 엄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아침에도 되도록 밥을 먹여 학교에 보냈고 도시락도 싸줬다.
그 어려운 시절, 어쩌면 엄마가 도망가지 않은 걸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툭하면" 나 아니었으면 너네 다 굶어 죽었어"라는 말을 내뱉었다.
대학 졸업 후 내 첫 월급의 대부분을 엄마가 당연한 듯 가져갔을 때, 나는 무너졌었다. 그렇게 나에게 겨우 몇 천원도 아까워했던 사람이 내 미래는 아무렇지 않게 가져갔다. 임용고시를 준비하기 위해 돈을 벌며 공부할 때도, 서울에서 일하며 해외 취업을 준비할 때도, 나는 언제나 날아오르려 했지만 그때마다 엄마는 돈을 부치라며 내 발목을 잡았다.
그런 엄마가 이제 와서 같이 여행을 가자고 했다. 살아남아 감사한 마음보다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는 엄마의 그늘아래서 숨 쉬고 빌붙어있다는 자괴감에 시달리던 20대. 그래서 결국 해외로 도피해 버린 나. 내 기억은 너무 선명하다.
지난날에 대한 미안함 때문일까. 아니면 나이 들고 외로워진 것일까. 정말 엄마는 기억이 없는 것일까. 나는 아직 그 마음을 다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대만을 여행하고 있다.
예류지질공원을 출발해서 다음 코스는 '지우펀'이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영감을 준 마을이라고 하는데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은 아니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