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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서 얻은 교실 아이디어 <캔터빌의 유령>과 황금계

by 공작




문학에서 얻은 교실 아이디어: 《캔터빌의 유령》과 황금계란 이야기




학교에서 일하는 강사 커뮤니티에 가보면, 아이들 때문에 힘들다는 이야기가 많이 올라온다. 선생님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떠들거나, 심하게 장난치는 아이들 때문에 수업 진행이 어렵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담임 선생님 말조차 듣지 않는데, 외부에서 잠깐 강의하러 오는 강사의 말을 잘 들을 리가 있을까? 오히려 더하면 더했지, 외부강사라고 다를 게 없다.


나 역시 오랜만에 학교에 기초학력강사로 나갔다가 충격적인 일을 겪었다.


“싫은데요, 아줌마.”

내가 가르치는 6학년 남학생에게 들은 말이었다.

공부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은 저마다 원인이 다르지만, 대체로 수업 태도가 좋지 않은 경우가 많다. 스스로 집중을 못하거나, 다른 학생들까지 방해하는 경우가 잦다. 떠드는 아이에게 주의를 주자 돌아온 그 말은 꽤 큰 충격이었다. 단호하게 “그렇게 말하면 안 돼”라고 했지만, 마음이 불편했다.

같이 근무하는 선생님도 학생의 버릇없는 말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나는 성격상 카리스마 있는 단호함보다는 친절함으로 다가갔다. 그것이 문제이자 장점이었다. 아이들은 나의 친절을 곧잘 이용했고,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깊어졌다. 간식을 주는 방법도 써봤지만, 그 효과는 오래가지 않았다. 간식은 순간의 즐거움일 뿐, 학습 태도 자체를 바꾸지는 못했다.


그 무렵, 나는 오스카 와일드의 《캔터빌의 유령》을 다시 읽었다. 이 작품은 고딕 전통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공포의 무게를 희극으로 전환한다. 미국인 오티스 가족이 영국의 낡은 성, 캔터빌 체이스에 입주한다. 거실 바닥의 핏자국을 최신 세제로 깨끗이 지워도,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다시 나타난다. 밤마다 유령이 사슬을 끌며 겁주자, 아버지 오티스는 “시끄럽다”며 윤활유를 건네고, 장난꾸러기 쌍둥이는 줄을 걸어 넘어뜨리고 베개를 던지는 등 유령을 희화화한다. 망신을 거듭한 유령은 점점 기세가 꺾여 숨어 지내게 된다.

여기서 갈등을 이루고 있는 것은 미해결의 죄와 기억이다. 나역시 수업 공간에서 아이들의 태도의 근본적인 원인과, 나라는 존재자체가 갈등을 겪고 있었다. 살해와 처벌의 폭력이 애도되지 못한 채 유령화 되어 다시 생기는 혈흔으로 나타난다. 표면 증상만 빠르게 처리하려는 태도는 근대적 합리주의의 문제점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거듭되는 유령의 실패는 어쩌면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본질적인 문제인 용서와 애도는 끝내 미루어진다는 것이고 이해의 부재가 낳은 결과이기도 하다.


이 통찰은 나의 교실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었다. 나는 수업 시간에 아이들에게 황금계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옛날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있었어. 하지만 주인이 욕심을 부리다 결국 거위도, 황금알도 잃고 말았지. 너희가 수업 시간에 집중하는 태도는 바로 황금알과 같아. 떠들면 재미있을지 몰라도, 그 시간은 사라지고 말아. 집중해서 얻는 지식은 네 인생을 빛내줄 황금알이 될 거야.”


그리고 실제로 나는 거위는 아니지만 작은 오리 모형을 준비했다. 수업 시간에 집중하지 않으면 오리를 회수했고, 일주일 동안 잘 지킨 아이들에게는 오리를 집에 가져가도록 했다. 오리모형, 그리고 숙제를 열심히 해온 아이, 공부에 성실하게 임한 아이에게는 진짜 황금계란 모형을 선물했다. 아이들은 장난감이 주는 상징적 의미에 반응했다. 단순한 보상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이 황금알로 바뀐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움직였다.


놀랍게도 변화는 빠르게 찾아왔다. 나에게 “아줌마”라고 했던 6학년 남학생은 예의 바른 학생으로 변했고, 늘 수업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던 4학년 여학생은 드디어 세 자리 수와 두 자리 수의 곱셈을 성공해 냈다. 아이들의 수업태도를 바꾼 것은 간식이나 보상이 아니라, 이야기와 상징이었다. 이후에 나는 조금만 선물을 줄 일이 있으면, 그냥 주지 않고, 이것은 "지혜의 연필"이라며 의미를 부여해서 주었다.

《캔터빌의 유령》이 보여주듯, 문제는 단순한 기술적 해결로는 풀리지 않는다. 세제와 윤활유가 얼룩을 지울 수 없듯, 잔소리와 훈계는 아이들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한다. 아이들은 버릇없는 말로 바로 맞받아치거나 선생님이어도 무시하는 말을 한다. 물론, 적절한 훈계는 어떤 상황에서든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아이들을 향한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려 한다면 그땐 멈추고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선생과 학생이라는 관계 속에서 어떤 부분이 필요한지 말이다. 나에겐 그것이 아이들을 공감하는 마음과 '이야기'였다. 이야기는 아이들의 방어적인 행동을 무너뜨리고, 교실 안에서 스스로 의미를 발견하게 한다.

오늘 우리의 일상은 빠른 해결과 효율성을 중시한다. 퀵 솔루션과 알고리즘에 의존하는 시대다. 그러나 인간의 내면적 성장은 즉시성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문학이 보여주듯, 그리고 교실에서의 작은 실험이 증명하듯, 진정한 변화는 이야기와 상징, 그리고 관계 속에서 천천히 이루어진다.

지금 내 교실에는 작은 오리와 황금계란이 있다. 아이들은 그것을 보며 집중하고, 책임감을 배우며, 자기만의 황금알을 길러가고 있다. 문학에서 배운 교훈이 교실에서 살아 움직이는 순간이다.


스토리의 힘은 강력하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아이들과 함께, 황금계란을 키워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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