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
삶도 그렇다. 내가 맞다고 우겨도
세상은 다시 열어보라’고 말할 때가 있다.
카페 문에 ‘미세요’가 붙어 있는데도, 나는 습관대로 당긴다. 문은 꿈쩍하지 않고, 나는 잠깐 민망해진다. 손잡이를 쥔 방향을 바꾸자 문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열린다. 그 짧은 찰나에 배운다. 내가 열려고 하면 닫히는 이유는 항상 나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기는 마음으로 열려고 하면 닫힌다. 내 판단은 언제나 극히 작은 부분 안에서 이루어지고, 나는 삶의 작은 깨달음이 있을 때마다 나보다 더 큰 세상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싶다. 그래서 옳을 길을 향해 가는 과정은 결론이 아니라 과정이다.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힘보다, 문을 다시 여는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수업에서 한 아이가 ‘틀린’ 풀이를 가져왔다. 나는 고치려다, 아이가 적어 둔 작은 메모를 보고 멈췄다. 기준을 바꾸면 답이 달라지는 유형이었다. 아이의 생각을 따라가 보니, 그 아이의 세계에서는 그 풀이가 정확했다. 나는 채점 기준을 수정했고, 아이는 “선생님, 제 생각을 들어줘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 부터는 이런 기준이 있음을 정확히 알도록했다. 그날 이후 수업은 조금 더 넓게 흘렀다.
끝까지 내가 옳다고 밀어붙였더라면 문은 닫혔을 것이다. 아이는 아무렇지 않게 나의 지적을 받아들일 것이고, 나는 융통성 없는 사람으로 굳어졌겠지. 닫힌 문은 사람을 고립시키고, 고립은 결국 나를 협소하게 만든다. 옳음을 지킨 대가로 관계와 배움을 잃는 셈이다.
우리는 모두 반쯤 완성된 지도를 들고 걷는다. 길은 수시로 공사 중이고, 표지판은 바람에도, 태풍에도 흔들린다. 다시 열어보기는 지도를 업데이트하는 최소한의 예의다. “혹시 다른 길이 있을까?” 하는 질문이 내 하루의 방향을 바꾼다.
다시 여는 습관을 들이자, 관계가 부드러워지고 생각이 가벼워졌다. 틀렸음을 고백해도 체면은 떨어지지 않았다. 대신 신뢰가 쌓였다. 나는 작은 나만의 의식들을 만들었다. 20초 멈춤, 한 걸음 물러서 보기, 그래도 열리지 않는 문이 있다면, 그땐 머무를 때임을 안다. 삶은 밀어야 열릴 때도, 당겨야 열릴 때도 있으니까. 중요한 것은 손잡이를 바꿔 쥘 만큼 내 손이 유연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