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키는 힘
송편은 아직 익는 중
“나중에 예쁜 딸 낳겠네”
어렸을 적 내가 빚은 송편을 보고 할머니가 하시던 말씀이다. 추석이 다가오면 엄마와 할머니는 하얗게 빻은 쌀가루를 반죽해서 쟁반에 수북하게 쌓아놓았다. 엄마가 동그란 원을 그리며 아기처럼 살살 다루던 반죽이 굳어지면 온 힘을 담아 큰 팔동작으로 덩어리를 힘껏 치댔다. “조금 더”라는 엄마의 요청에 따라 나는 조심조심 따듯한 물을 “이만큼? 이만큼?”하며 넣었다. 그리고 겉면이 마르지 않도록 하얀 천을 덮어놓았다. 할머니와 엄마는 아빠와 나 그리고 남동생에게 조금씩 반죽을 떼어 주셨다. 그러면 우리는 다채로운 모양으로 송편 빚는 솜씨를 뽐냈다.
추석에 늘 들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송편을 예쁘게 만들면 나중에 예쁜 딸을 낳는다는 속설이다. 수분기 머금은 쌀 반죽을 동그랗게 굴린 뒤 납작하게 펴서 달콤하고 고소한 깨 속을 넣고 반달 모양으로 오므린 뒤 정성스럽게 매만지면 달빛처럼 고운 송편이 완성되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내 송편은 정갈한 모양새가 갖춰져서 제사상에 정성스럽게 올릴 송편으로 분류되었다. 가족들은 내가 빚은 송편을 보고 나중에 예쁜 딸을 낳겠다고 칭찬했다. 한껏 으쓱해진 나는 한나절을 앉아서 한 알 한 알 만들어 내는 일이 그리 피곤하지 않았다. 학창 시절 가정 숙제가 집에서 만든 송편을 가져오는 것이었는데, 내 송편을 본 친구들과 선생님의 감탄하는 목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어느 해 엄마의 송편 모양은 형편없이 못생겼었다. 대충 주먹으로 한번 꽉 쥐어서 막 찌고 막 집어먹어도 괜찮은 송편을 대량생산하고 있었다. 엄마한테 좀 예쁘게 만들면 안 되겠냐고 잔소리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엄마의 송편이 어쩐지 불편하고 실망스러웠다. 내가 엄마만큼 예쁘지 않은 이유가 어쩌면 송편 모양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엄마와 반대로 나중에 꼭 예쁜 딸을 낳겠다고 다짐하며 손끝을 분주히 움직였다.
이젠 내가 그 시절 송편을 빚던 엄마 나이보다 많다. 생각해 보니 세탁기도 없던 시절이다. 시골집엔 명절이면 해마다 어마어마한 음식 준비와 손님치레로 바빴다. 넉넉지 않은 살림이 엄마의 손끝 힘과 멋 부릴 여유를 빼앗아갔으리라. 내 중학교 교복이 아직 어색하게 느껴지던 무렵 우리 가족은 넓은 시골집에서 좁은 단칸방으로 이사 갔다. 아빠의 사업 실패 때문이었다.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엄마와 할머니를 생각하면 북적임이 사라진 명절 끝자락처럼 마음 한구석이 시리다.
한참 후에야 엄마에게 그 상황에 어떻게 그렇게 큰 살림을 할 수 있었느냐고 물어보니 엄마는 “그냥 그땐 다 그랬어, 다 그렇게 사니까 그래야 하나보다 했지”라고 했다. 그때 송편을 빚던 우리는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할머니와 엄마가 보여준 부지런함과 생활력으로 내 동심의 나날이 지켜진 것이었고 강인하게 살아낸 그녀들이 오늘 내게 추억을 선물한 것이다. 지금 할머니와 아빠는 곁에 안 계시지만 송편이 익어가는 시간은 내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있다. 예쁜 딸 낳겠다는 할머니의 칭찬은 우리 가족이 송편을 만들어서 다 같이 먹고, 함께 머문 계절이 소중하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믿음을 주기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송편은 여전히 예쁘게 익는 중이다.
돌아가신 할머니를 꿈속에서 만난다면 꼭 말하고 싶다.
“할머니 저 잘생긴 아들이랑 예쁜 딸 낳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