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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셋증후군 May 13. 2024

6. 아, 잠깐만요! (2)

제2장 면접: ‘나’는 누구인가

아, 잠깐만요! (2) 


본부장님은, 이런 능력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뭔가 ‘이빨’의 단계가 멘토 형, 팀장 선배, 지점장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면접을 가면서 팀장 선배가 바람을 잡기 시작했다. 


“호기야, 이 분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글로벌 본사 명예의 전당에 오르신 분이야. 30년 넘게 영업하면 사람이 반점쟁이 된다. 이 분이 후보자들에 대해서 뭐하고 하면 그런 일이 꼭 생겨. 만약에 진짜 이 분이 너 안 된다고 하면 나도 그땐 도리가 없다. 그러니까 면접 잘 보고 와” 


원래 금융 영업하는 사람은 흰 와이셔츠 입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 날 따라 뭔가 느낌이 검은 셔츠에 회색 타이를 하고 싶었다. 그렇게 무기를 장착하고 본부장님과의 면접을 위해 자리에 앉았다. 면접 장소에는 가로 10미터가 넘어 보이는 책상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 양 끝에 앉아서 면접을 봤다. 마침 본부장님 뒤에 조명이 있어서 얼굴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시작하자마자 본부장님의 기선 제압이 시작됐는데, 반격할 힘도 없이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본부장님은 지원동기나 퇴사하려는 이유 등에 대해서 전혀 묻지 않았다. 그저 본인이 하고 싶은 말씀을 주르륵 하실 뿐이었다. 


내 이력서를 잠시 보시던 본부장님이 입을 열었다. 


“리셋증후군 씨는 아버지께서 사업을 하시고, 어머니께서는 화가시고, 동생은 수녀님이시네요. 그런데 본인은 보험 영업을 하려고 한다고요? 내 생각에는 지금 리셋증후군 씨가 다니고 있는 회사가 꽤 좋은 것 같습니다. 지금은 그 회사를 잘 다니시고, 만약에 5년 뒤에도 이 일이 하고 싶어지면 그때 오세요. 그렇게 합시다” 


음? 면접 끝? 


잠시 침묵이 흘렀는데, 타이를 너무 조여서 피가 거꾸로 솟아 오르는 와중에 눈깔이 튀어 나올 것 같았다. 그리고 내 뇌 속에서는 계속해서 폭발음이 들렸다. 본부장님은 내가 일어서서 나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너무 당황하고 흥분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는데, 본능적으로 한 마디를 했다. 


“아, 잠깐만요” 


숨이 잘 쉬어지지도 않았는데도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본부장님께서는 말을 계속 하라는 듯 조용히 앉아 계셨다. 


“지금 저에게 다음에 오라고 하신 겁니까? 제가 이 일을 지금 하면 왜 안 되는 거죠? 한 달간 줄곧 이 일의 비전에 대해서 설명하고는 그냥 돌아가라는 겁니까? 왜요? 제가 5년 뒤에 오면 뭐가 달라집니까? 보험 영업할 때 소개해줄 인맥이 늘어나나요? 지금은 제가 인맥 쌓을 수 없나요? 부자 인맥? 의사 인맥? 그거 다 만들면 되는 거 아닙니까? 이 일 꼭 필요한 일이라면서요? 저도 공감했으니까 하려고 하는 것 아닙니까! 제가 못할 것 같습니까? 안 해보고 어떻게 압니까? 저 이미 회사도 그만 뒀고, 여기서 그냥 못 일어나겠는데요” 


이런 말이었던 것 같은데, 정말 내 이성이 아니라 유전자 속의 어떤 것이 말을 하고 있었다. 멀리서 보이는 본부장님이 미소를 지었다. 


“리셋증후군 씨, 저는 부산 사람입니다. 스무 살에 서울에 올라와서 보험 영업을 한다고 돌방도 해보고 빌딩도 탔습니다. 그래서 큰 부를 일궜지요. 예전에는 열심히 하면 부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선택을 잘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보기에 요즘 시대에 부자가 되는 방법은 몇 가지가 없습니다. 그 중에 리셋증후군 씨가 선택한 이 방법은 내가 증명했다시피 리셋증후군 씨를 부자로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오늘 정말 좋은 선택을 하셨습니다. 열심히 해보세요” 


그렇게 말씀을 시작하시더니, 최근에 읽은 책이나 본인 말씀을 여러 가지 해주셨다. 그리고는 내 이력서에 멀리서도 보일 만큼 큼지막하게 ‘O.K.’를 적으셨다. 12년 전의 일인데 이렇게 또렷이 기억하는 것을 보면 정말 울림이 컸던 것 같다. 


그렇게 면접을 마치고 나가니 바로 팀장 선배가 들어갔다. 그리고 본부장님 말씀을 듣고 나왔는데 표정이 심각하게 좋았다. 


“호기야, 너 면접 잘 봤나 보다!” 

“떨어지는 줄 알았는데요” 

“음? 왜? 무슨 얘기했는데?”

“처음에는 막 오지 말라고 하시더니, 나중에는 부산에서 올라와서 보험 시작하신 얘기랑, 최근에 읽은 책 얘기랑 여러 가지 해주셨어요” 

“아, 이런 적은 처음이네. 어쩐지 좀 오래 걸리더라” 


훗날 들어보니, 본부장님 당신이 그 동안 면접을 본 후보자들 중에 자질로는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고 했다. 그러니 선배 팀장에게 잘 키워보라고 했단다. 본부장님 말씀 듣고 나오던 선배 팀장의 표정이 왜 그랬는지 그때 알았다. 그렇지만 내가 13차월여 보험 영업을 하는 동안 그런 평가를 받을 만큼 잘하지는 못했다. 일을 그만두는 날 선배 팀장과 둘이 앉아서 술을 먹었다. 내가 그만두게 되어 죄송하다고 말했다. 


선배 팀장은 ‘나도 미안하다’고 했다. 


“호기야, 네가 그만두게 되는 게 나한테도 큰 일이라 그 동안 내가 뭘 못했는지 복기해봤다. 내가 크게 실수한 게 있더라. 너 본부장님 면접 본 날 기억하니? 그때 나에게 본부장님이 너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조금 늦게 잘하게 될 거라고 했거든. 근데 나는 그 동안 봤던 후보자 중에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고 하니까 그것만 생각하고 기대가 너무 컸던 거야. 초반에 다른 팀원들과 조금 다르게 대했더라면 어땠을까 후회가 된다. 너무 닦달하기만 했어. 내 팀원들의 성공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라 나도 급했던 것 같아” 


하, 따뜻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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