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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셋증후군 May 13. 2024

9. 온실 속의 화초처럼 크셨군요

제2장 면접: ‘나’는 누구인가

온실 속의 화초처럼 크셨군요 


대행사의 거친 삶을 살다가 대기업 홍보실에 와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나름 이것저것 참 열심히 일했다고 생각했는데, 공채로 들어와 줄곧 일해온 같은 연차의 친구들보다 더 나을 것이 없어 보였다. 업무 역량도 비슷하고, 업무 스킬도 특출한 게 없었다. 오히려 인하우스의 삶에 적응하는 것이 큰 과제였다. 선배들은 대행사에서 아득바득 일해온 나보다 여유로웠고 포용력이 있었다. 


그렇게 5년째로 접어드니 유전자 속의 뭔가가 또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마음 속의 내가 현실 속의 나에게 계속 떠들어 댔다. 


‘너 커서 뭐 되려고 그래!’,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지 않아?’, 

‘여기서 만족하는 거야?’, 

‘또 뭔가 도전해야지!’ 등등 


마침 헤드헌터들에게도 연락이 왔다. 그 중에 느낌이 남다른 헤드헌터가 있었는데, 정말 목소리만 듣고도 인연이 만들어질 것 같았다. 1차 면접은 헤드헌터가 직접 봤다. 그리고 의뢰한 회사에 나를 포함 총 네 명의 후보자를 보냈다고 했다. 회사에서 이 중 면접을 누구와 보면 좋겠는지 물어봐 나와 또 한 명을 추천했다고 했다. 그렇게 몇 주 뒤 그 회사 부사장님과 면접이 잡혔다. 


면접을 앞두고 떨렸다. 카리스마 넘치는 부사장님과 헤드헌터 사무실에서 만났다. 특별히 어려운 질문은 없었는데, 제대로 대답했다는 느낌도 스스로 갖지 못했다. 면접관으로 들어온 부사장님이 먼저 경력사항을 체크했는데, 많이 신선했다. 보통은 ‘이직이 많은 이유’를 물어보는 것이 보통인데, 그 질문은 하지 않으셨다. 대신 첫 직장부터 하나하나 짚으면서 실제로 어떤 일을 했고, 어떤 점을 익혔는지 물어봤다. 두 번째 회사, 세 번째 회사, 네 번째 회사 그리고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의 업무까지 꼼꼼히 물어보셨다. 그러면서 중간중간에 ‘이 프로젝트를 리딩한 것은 아니시군요’, ‘기자를 직접 만나신 거죠?’, ‘광고 아이디어까지 직접 냈나요?’ 등 구체적인 업무 내용을 체크했다. 


경력사항을 확인한 뒤 부사장님은 이렇게 짧게 말했다. 


“리셋증후군 씨, 지금 회사에서는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셨네요” 


가슴이 덜컹 내려 앉았다. 처음부터 엄청난 압박감을 느꼈지만 위 얘기를 듣고는 얼굴 표정 관리도 안되고, 온 몸이 떨려 정상적인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부사장님이 회사를 지원하게 된 이유를 물었다. 나는 이직 기회를 가져보려고 했는데, 특별히 이 회사를 목표로 한 것은 아니라고 말씀 드렸다. 하지만 기회가 돼 이 회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해 본 후 지원하게 되었다고 말씀 드렸다. 그리고 겨우 다음과 같이 말하고 면접을 마쳤다. 


“부사장님, 제가 이 회사에 입사하게 되면 가장 먼저 제 마인드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 저는 스스로 강해지고자 노력해왔습니다. 물건 하나 팔아보지 못한 놈이 무슨 광고니, 홍보니, 마케팅이니 떠들 자격이 있나 싶어서 보험 영업을 했습니다.


이런 경험이 좋은 경험인지는 모르겠지만 대학교 시절에는 네트워크 마케팅에 관심이 있어 암웨이 세미나에도 다녀봤습니다. 저는 마케팅의 미래가 고객을 회원으로 만들고, 고객이 스스로 추천해 물건이 팔리고, 또 그것을 사용해본 고객이 또 다른 고객을 추천해주는 시스템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가 다니는 회사에서도 광고 산업 구조를 익히는 등 제가 지금 배워야 할 것들을 차곡차곡 배워나가고 있습니다. 부사장님께서 ‘온실 속 화초’ 같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도 공감합니다. 저도 똑같이 저에 대해서 느끼고 있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만약에 입사하게 되면 ‘상인’의 마인드로 일해보고자 합니다. 저도 제 안에 상인의 마인드가 존재하는지, 제가 ‘상인’의 자질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마도 이 곳이 제가 그 동안 경험해오고 배우고 익혀온 마케팅, 광고, 홍보, 영업 등의 경험들을 다 녹여 일할 수 있는 곳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가늠이 안 됐다. 다크 서클이 턱까지 내려온 채로 면접자리에서 나오자 밖에 헤드헌터가 앉아 있었다. 그 분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안색이 안 좋아 깜짝 놀랐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오래했냐고 물었다. 두 시간 동안 면접 보는 경우는 처음이라고. 나는 면접을 잘 보지는 못한 것 같다고 하고 힘없이 사무실을 빠져 나왔다. 


그 다음날 아무 연락이 없어 더 마음을 내려놨다. 


이틀 후에 헤드헌터에게 연락이 왔는데, 부사장님이 너무 만족했고, 조금만 적응하면 잘 할 것 같다고 나에 대해 기대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꽤 높은 연봉을 제시 받았고 바로 수락했다. 헤드헌터가 레퍼런스 체크를 두 명에게 받아야 한다며 나에 대해 이야기 해 줄 분들을 알려달라고 했다. 내가 그 중 한 명으로 내 사수를 알려드리자 이 경우도 참 특이하다고 했다. 보통 같은 팀 사람들에게는 이직이 확정될까지 알리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했다. 난 상관없다고 했다. 지금 나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내 사수이니까. 


레퍼런스 체크가 끝나고 헤드헌터가 다시 연락이 왔다. 그리고 이번 일로 참 신기한 경험을 많이 하게 된다고 말했다. 고객사에서 내 레퍼런스 리포트를 보고, 좋은 사람을 데려오는데 앞서 계약한 연봉보다 더 올려주고 싶으니 적정 액수를 헤드헌터 본인에게 말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연봉이 조금 더 올랐으니 다시 사인하러 방문해달라고 했다. 


온실 밖으로 나가려는 내게 힘이 되는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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