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봐요. 어디든 올려보라고 했잖아요.-파스타 편집자-
진 편집자와 나는 2008년도에 만났다.
그리고 2009년 파스타 책이 나올 때까지 1년여간 함께 작업했고 이후의 시간 동안 우리는 만나지 않았다.
얼마 전 주말에 그녀를 만난 건 그러니까 14년 만이었다.
"와!! 작가님 안 변했네요?!!"
나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에 무슨 소리냐며 웃음을 터트렸지만 속으로는 "진짠가?"
뻔한 거짓말이라도 사실 좋았다.
커피콩을 직접 볶는 카페에 앉자마자 나는 나의 세 번째 책을, 그녀는 사계절 출판사의 신간
고병권 산문집 [사람을 목격한 사람]을 교차로 내밀었다.
"예쁘네요! 이야.. 출판사 어떻게 만났어요? 잘 만들었는데요."
그녀는 치즈 책을 받자마자 찬찬히 살펴보고는 정말, 마침내, 책을 만들어 냈음을 다시 한번 칭찬해 줬다.
"지금 제 담당 편집자가 브런치에서 치즈 글을 보고 연락 줬어요. 6개월을 지켜봤데요."
"거 봐요. 작가님. 제가 어디든 올려보시라고 했잖아요."
파스타 책(민희, 파스타에 빠져 이탈리아를 누비다-2009년 푸른숲)이 끝나고 몇 년 뒤, 내가 치즈 책을 쓰러
다시 유럽에 나가겠다고 다짐을 하고 조언을 구한 사람은 진편집자였다. 그녀에겐 뭔가 심지 깊은 면모가 있어서 작업이 끝났음에도 나는 가끔 연락을 하곤 했다.
그때 진편집자는 나를 말렸었다. 이 분야는 이제 어렵다고 했다. 편집자로서 시장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을 믿고 있었다. 하지만 믿는 건 믿는 거고 나는 준비 끝에 영국으로 치즈 여행을 떠나 버렸다.
다녀와서 출판사를 못 잡고 혼란스러울 때 가끔씩 진편집자에게 연락을 했다.
바쁠 텐데 그런 저런 말 없이, 되고. 안 되고의 일들을 정리해서 조언해 주곤 했다.
그리고 두 해 전즈음 내가 독립출판을 한참 알아볼 때 그건 또 아니라고 말려주었다.
"출판은 출판사랑 하는 게 가장 좋아요. 아니면 어디에라도 올려 보세요. 활동을 해야 누구라도 보죠."
브런치 Brunch를 알게 된 건 그즈음이었다. 독립출판 카페에 원고 고민글을 올렸더니
누군가 댓글로 알려주면서 글을 전문으로 올리는 작가들 사이트라고 했다. 문제는 관문을 통과하기가 쉽지 않다는 후기들이었다. 재수는 필수, 삼수는 기본이라 했다. 그 어렵다는 브런치는 입학 관문만 통과하면 대신 출판사들이 눈여겨보았다가 연락을 준다고 했다.
원고가 어느덧 8년 차, 이러다 원고가 사장되어 버릴까 두려움이 가득했던 끝에 브런치 응모를 해 봤다. 입학 서류 내 듯이 사이트에 작성된 글을 등록하고 작가 가입 신청서를 누른 뒤, 여기서 떨어지면 브런치는 대체 몇 수를 해야 하며, 내 글은 어디에 올려야 세상에 알릴 수 있는 것인지 마음이 너무 심란했다.
그러나 브런치는 1차에 운이 좋게 통과되었고 영국 치즈 연재를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에 글만 올리면 어느 출판사든 연락이 올 줄 알았건만 1년이 넘도록 아무도, 누구도 연락을 안 했다. 그 사이 수 십 곳의 출판사들로 보내본 원고에 대한 대답은 하나같이 "이 테마 여행기는 어렵겠어요."였다.
이 모든 과정이 지난 10년간의 일이었고 대부분의 흐름을 알고 있는 진편집자에게 이번 책을 직접 전해주고 싶었다. 시작할 땐 어렵다고 말렸지만 이미 시작한 일에는 응원을 아끼지 않았던 그녀의 조언들이 헛되지 않아 결국 해냈음의 결과를 전해주고 싶었다.
*사계절 출판사 인문팀 이진 편집팀장은 20만 부의 판매고를 올리고 여전히 널리 읽히는 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에세이)의 책임 편집자다.
영국 치즈 찾기는 여행을 다녀와서 원고의 구성을 잡는데 1년이 넘게 걸렸다.
어떻게 쓸 것인가, 어떻게 풀어내야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쉽고 재미있고 그러나 영국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여행책이 기본이니 고행을 많이 풀어낸다면 재미는 있겠지만 그건 여행서의 기본 내용이니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치즈, 문제는 치즈의 제조 과정을 치즈마다 샅샅이 찍어 왔는데 너무 상세히 쓰면 읽는 사람들 한정적으로 좁아지지 않을까. 그럼 책이 안 팔릴 테고 대중성이 없다는 평으로 끝날 텐데.
육아를 하면서 원고를 써야 했기에 아이들이 잠드는 매일 밤에 누워서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렸다.
전체 원고의 배치를 어느 부분 부터 할지, 농장에서 치즈 만드는 과정은 얼마만큼 자세히 서술할지.
영국 치즈의 아픈 역사를 글 사이사이 얼만큼 넣을지.
글의 위치를, 넣고 싶은 사진을 시뮬레이션하듯 배열을 해봤다.
하지만 배열이 복잡해지면 다 흐트러져 버렸고 결국 각 농장마다 하고 쓰고 싶은 내용들을 작은 종이에 써서 큰 벽에 일일이 붙였다. 드라마에서 인물의 흐름을 벽에 붙여 그림을 만들 듯 나는 치즈의 흐름을 벽에 그렸다.
원고는 안 써지는 날이 더 많았다.
그저 치즈 여행기가 아닌 영국 농장들의 아픈 역사를 담고 싶었다.
세계 1차, 2차 대전을 겪으며 섬나라의 약점인 고립의 공포에 우유를 정부에서 관리했고
치즈의 다양성조차 제지했다. 그 유명한 체더치즈가 바로 이때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치즈 중 하나다.
이런 역사적 내용들은 영문 원서 자료들을 번역하는데 한 달씩 걸렸다.
번역한 글을 원고에 녹여 쓰려면 또 한참이 걸렸다.
어느 부분에 자료 번역 글을 넣어야 할지 정보성 글과 에세이가 잘 섞이는 위치를 찾아야 했다.
이렇게 각 농장마다 글을 쓰다 보니 몇 년이 지나갔다.
엊그제 밤, 아이들을 재우려 누웠는데 내 머릿속엔 또 다른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인스타그램에 올릴 치즈 사진들, 브런치에 올릴 치즈책이 만들어지까지의 과정의 글.
책이 나왔으니 마케팅을 위해 무엇을 할지 어떻게 할지 그 배열을 그리고 있었다.
지난 10여 년간 책을 만들어내기 위해 밤마다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이젠 만들어진 책을 위해 그림을 그려야 한다.
익숙하지만 방향성이 달라진 그림의 모습에 아.. 다행히 다음 스텝으로 넘어왔구나.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끝도 없던 오랜 시간의 터널이 끝났다.
책을 알려야 하는 다른 터널이 나타나긴 했지만 다행이다.
여기까지 올 수 있어서 참 고되었지만 다행이다.
안도의 그림을 다시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