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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희 Jul 18. 2021

작은 치즈 박물관, 리펀 치즈 2 LONDON

RIPPON CHEESE  LONDON


“저 안에 들어가 봐도 되나요?”

당장이라도 습한 치즈 향을 뿜어내는 저장고 문을 벌컥 열어 들어가고 싶었지만,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분리된 공간에 보호되듯 보관된 치즈는 다가가기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이미 캐런 아주머니가 허락했음에도 루크에게 다시 한번 물은 것이었다. 내가 저 귀한 치즈들이 모인 곳에 들어가도 되겠느냐고. 루크는 ‘물론’이라는 표정으로 저장고의 문을 열어주었다. 겨우 얼굴만 들이밀었는데도 양쪽 벽을 따라 펼쳐진 치즈들의 위엄에 압도될 정도였다

“와.. 아..”

저절로 외마디 감탄사가 나왔다. 이런 광경을 마주할 때면 나는 항상 보는 것만으로도 감동적이어서 선뜻 다가가지 못한 채 한동안 얼어 있기 일쑤였다. 그동안 찾아다녔던 여러 나라의 치즈가게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선반에는 커다란 덩어리 치즈가 아닌 한 손에 쥘 수 있을 만큼 작은 치즈가 가득 놓여 있었다. 전부 다른 종류의 치즈였고, 치즈마다 일일이 설명서를 붙여놓았는데, 그 개수만 세어봐도 족히 수백 개는 넘어 보였다. 치즈 설명서에는 제조 원산지, 사용된 우유의 종류, 치즈의 유래, 킬로그램당 판매 가격이 적혀있고, 치즈 사진까지 함께 넣어 옆의 비슷한 치즈와 헷갈림도 막아 주었다. 혼자서 치즈를 고를 수 있을 만큼의 내용이 담겨 있어 레스토랑의 셰프들이 직접 치즈를 고르러 왔을 때 일일이 테이스팅을 안 해도 치즈에 관한 정보를 어느 정도 얻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진열된 치즈의 수에 있어서도, 해설의 꼼꼼함에 있어서도 작은 치즈 박물관을 방불케 했다.  그리고 그 다양한 치즈 사이에서 시선을 붙잡은 건 짤막한 메모였다.

저장고의 문을 열자 수백 가지의 치즈가 늘어선 광경이 펼쳐졌다.
치즈 마다에 작은 메모는 제조 원산지, 사용된 우유의 종류, 킬로그램당 가격, 치즈의 유래 등이 적혀 있어 혼자서 치즈를 고를 수 있게 도와주었다.


“Celebration Cakes, Made to order, With Love OOO(축하 케이크, 주문 제작, 사랑하는 OOO)”

케이크 주문 제작을 받는다는 문구였는데, 나는 치즈가게에서 케이크를 만든다면 당연히 빵 속에 치즈가 들어간 모양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치즈를 빵집으로 보내서 치즈케이크를 만들어주는 건가요?”

하지만 내 질문에 루크가 보여준 사진은 전혀 ‘치즈케이크’의 모습이 아니었다.

“치즈를 크기대로 쌓아 케이크처럼 만들어요. 자연 치즈 그대로요. 제일 큰 치즈를 아래에 놓고 그보다 작은 치즈들을 차례로 위에 올려요. 가격은 요청하는 금액에 맞출 수 있어요. 100파운드, 200파운드(약 30만 원) 하는 식으로요. 대부분 결혼식 케이크로 주문하는데 파티가 끝나면 손님 수만큼 치즈를 잘라 나눠주죠.”


이 케이크의 정식 명칭은 ‘치즈 웨딩 케이크 Cheese Wedding Cakes’로, 대부분 5단 높이에 꽃이나 과일 등 자연미를 살린 장식을 얹는다. 숙성으로 얼룩덜룩 해진 치즈 덩어리들을 켜켜이 쌓아 무슨 모양이 나올까 싶었는데, 자연 치즈에 푸릇푸릇 한 자연 재료들을 얹어 만든 케이크는 의외로 우아한 자태를 풍기고 있었다.


단, 이 케이크에 쓰이는 치즈 종류를 고를 때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었다. 치즈는 계절에 따라 기온이며 습도, 바람 등에 큰 영향을 받는 음식이다. 때문에 날이 더운 여름에는 수분이 많은 물렁한 치즈(카망베르와 같이 숙성 기간이 한 달 남짓인 하얀 곰팡이 치즈)를 자제하며, 다수의 하객을 위해 향이 강한 치즈(쿰쿰한 냄새가 심한 블루치즈는 영국인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갈린다.)보다는 대중적인 치즈를 쓴다. 또한 상징적인 의미로 결혼식이 열리는 지역에서 만들어진 전통 치즈를 쓰기도 하며, 케이크 크기는 하객 1인당 100그램을 기준으로 정한단다. 잔치가 끝나면 손님들에게 떡을 챙겨주는 우리네처럼 이곳 사람들은 치즈를 챙겨준다는 말이 어찌나 친근하게 들리던지.

치즈 웨딩 케이크 @사진출처 리펀치즈 홈페이지

오롯이 치즈로만 만든 케이크에 빠져 있는 사이, 루크의 입술이 파랗게 얼어 있었다. 행여 나 때문에 감기 들까 싶어 얼른 그를 밖으로 밀어내곤, 천장의 팬이 돌아갈 때마다 불어닥치는 찬바람을 막기 위해 온몸을 웅크린 채 블루치즈가 모여 있는 선반 앞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블루 드 젝스 Bleu de gex(프랑스 블루치즈), 캄보 졸라 Cambozola(독일 블루치즈), 작은 도자기병에 담긴 스틸턴Stilton(영국 블루치즈)까지 그 종류가 어찌나 많던지, 처음엔 눈으로 세다가 나중엔 손가락으로 짚어나가다가, 결국은 벌떡 일어나 저 위에까지 세고 보니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총 6개 나라의 블루치즈만 43가지 종류나 됐다. 닐스야드 데어리에서 본 여덟 가지 블루치즈에 놀랐었는데, 이곳에 비하면 댈 것도 아니었다.


인터뷰는 해도 사진 찍기는 민망하다는 필립 아저씨에게 왜 치즈가게를 열었는지 물었다.

“왜 치즈가게를 열었냐고요? 치즈는 빵이나 과일, 과자하고는 다르거든. 예를 들면 4월의 치즈랑 7월의 치즈는 서로 달라요. 설령, 같은 계절의 치즈라 해도 비가 오는 날이랑 해가 뜬 날도 다르고요. 어떤 농장 주인은 치즈가 너무 습한 곳에 있으면 ‘아이코 마이 베이비, 너무 습했구나!’ 그러거든요. 치즈는 항상 살아 있고, 그래서 아기처럼 계속 신경을 써줘야 하니 이보다 재밌는 직업이 어디 있겠어요.”

치즈를 판매하는 사람이 아니라 농작물을 키우는 농부 같은 대답이었다.

“블루치즈를 보려면 리펀으로 가라”는 정평답게 43가지의 블루치즈가 진열되어 있었다.


생각해 보니 나 역시 그랬다. 길을 가다 상점의 치즈가 햇빛을 고스란히 받는 자리에 진열되어 있는 걸 보면 ‘아이고, 얘들을 어쩌나’ 하는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곤 했다. 치즈를 사랑하지 않으면 모를 이야기들을 한참 동안 필립 아저씨와 나눈 후 촬영을 끝낸 사진들을 필립 아저씨의 컴퓨터에 옮겨 드렸다.

그새 버킹엄궁에서 돌아온 캐런 아주머니가 상점 입구까지 배웅을 해주었다.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하던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체더치즈를 볼 만한 농장을 알려줄 수 있는지 물었다.

“퀵이지요. 메리 퀵, 그녀라면 당신을 꼭 도와줄 거예요.”

마침 옆에 퀵의 치즈가 진열돼 있었다. 이 치즈가 맞는지 묻자 캐런 아주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퀵Quick은 저장고 안쪽 선반에 쌓여 있던 치즈 중 하나였는데, 그 색다른 이름 때문에 기억하고 있었다. 빨리 만들었다는 의미인지, 빨리 만들었으면 얼마나 잘 만들었을까 싶은 이름이었다. 컬러로 인쇄된 종이로 치즈 주위를 띠처럼 감싸 포장한 모습은 작은 종이라벨만 붙여둘 뿐인 여느 치즈들과 달리 세련돼 보였다. 모슬린에 싸인 외형은 전형적인 체더치즈였는데 내 관심은 거기서 멈췄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퀵’은 만든 사람의 이름이었고, 그것도 아주 전통적인 농장에서 만들어지는 치즈였다. 사실 그 이름에는 내가 놓친 ‘s’자가 있었다. 그러니까 ‘Quick’이 아니라 ‘Quickes’였다.

-전통의 퀵스 (Quickes Traditional)-

훗날 퀵스가 어떤 의미가 될지 그때의 나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추운 저장고 속에서 입술이 퍼레지도록  치즈 설명을 해 준 매니저 루크

 


**치즈 포장

체더치즈에 띠지 하나로 포장이 완성된 모습

치즈는 숙성된 정도에 따라 포장이 달라지는데, 체더치즈처럼 오랜 숙성을 거친 치즈들은 대부분 따로 포장을 하지 않는다. 치즈에 매단 작은 라벨에 제조 농장과 제조 날짜를 넣는 정도다. 오랜 숙성을 거친 하드 치즈들의 껍질은 먹지 않는 부분이기에(기호에 따라 껍질을 먹기도 한다. 단단한 질감이 좋아서도 그렇고 껍질만의 풍미가 있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있다.) 치즈를 멀리 이송하더라도 개별 포장을 하지 않고 상자에 바로 넣는다.

짧은 숙성의 소프트 치즈는 작은 힘에도 쉽게 눌리기에 나무 상자를 보관 통으로 사용한다. 보관 용기로 나무나 종이 재질을 사용하는 이유는 치즈가 숨 쉴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치즈는 이동 중에도 계속 발효를 하기 때문이다.


리펀 치즈 가게 Rippon Cheese

26 Upper Tachbrook St, Pimlico, London SW1V 1SW (지하철역 Pimlico 혹은 Victoria Station에서 도보로 10분)

월-금 8:00~17:30, 토 8:30~17:00, 일요일 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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