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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민희 Jun 26. 2020

밥상, 자기돌봄의 시작

오늘도 공부 매거진 창간준비호 첫번째 칼럼

여름입니다. 사시사철 채소가 풍성한 요즘이라도 제철에 먹는 채소 맛이 더 싱싱하게 느껴지는 것은 기분 때문일까요? 감자, 가지, 호박, 오이, 토마토 그리고 갖가지 과일까지. 찬란한 빛깔과 향기 덕분에 주방은 생기가 돕니다. 스마트폰으로 물건을 보고 택배로 이튿날이면 받을 수 있는 편리도 감사하지만, 저는 여전히 시장이나 생협에서 눈으로 보고 만져 제철 재료를 사는 일을 좋아합니다.


장을 본 다음날 아침에 감자를 삶고 호박을 잘라 구웠어요. 둥근 호박은 올리브 오일을 살짝 둘러서 구우면 맛있는 냄새가 납니다. 노릇하게 익어 달큰한 맛은 저녁까지 생각나고 침이 꼴깍 넘어가죠. 여름 밥상은 마음에도 활기를 채웁니다. 코로나 19의 영향으로 마음이 무거운 요즘, 삼시세끼 밥상이 마음을 어루만집니다. 때론 지겹기도 하고 귀찮음도 찾아오지만 밥상을 차리는 일은 무엇보다 소중한 자기 돌봄의 시작임을 다시 새겨봅니다.     



돌아보면 제 삶의 사상과 철학이랄 수 있는 기준점들의 많은 부분은 96세경 몸을 떠나 본래 자리로 돌아가신 할머니 김말녀 옹에게 배운 것들이 많습니다. 제가 6살 무렵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으니까 할머니는 30년 가까이 혼자 사셨어요. 자명종도 없이 매일 새벽 4시쯤 일어나 정갈하게 세수하시고 초를 켜고 매일미사 책을 펼치셨죠. 5시부터는 밥을 안치고 남새밭에 나가서 움직이기 시작하셨습니다. 아침 해가 살짝 뜨거워지면 돌아와 잠시 쉬었다가 서두르지 않고 밥상을 준비하셨어요. 혼자일 때도 식구가 여럿일 때도 밥상에 대한 자부심과 정성은 일관되었습니다. 한 끼 한 끼 정성스럽게 재료의 균형을 맞추고 맛있게 요리하고, 적은 양을 천천히 음미하며 드셨던 할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선합니다.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통념 때문에 이런 기쁨을 누리지 못해본 우리집 남성들을 생각하면 몹시도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할머니의 부엌은 매 끼니 재료들을 새롭게 보고 그때의 느낌을 존중하고 살리는 작업실이었어요. 생명력이 가득한 재료들, 무엇하나 함부로 하지 않는 소중함, 소박하지만 맛도 모양새도 만족스럽게 담아낸 밥상은 단순한 에너지원이 아니라 마음도 충전시킨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된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의 마음 밭을 일구는 강연을 마치고 돌아와 잠시 쉬었다 밥상을 차립니다.       




초고 끄적임

여름날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것은 하나의 의식입니다. 쌀을 안치고 밥이 되기를 기다리는동안 짧게 나마 요리를 합니다. 하지감자, 호박, 오이, 가지, 토마토 여름이면 풍성한 채소를 썰고 굽고 무치고 볶습니다. 하루에 한 두가지지만 여름 식사를 준비하는 마음은 즐겁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이 같은 루틴은 할머니에게 배운 것 같습니다. 5살 무렵 시골에 내려가 살게 되었는데 할머니 곁에서 배운 것들이에요. 남새밭에서 한 두가지라도 싱싱한 것들을 가지고와서 반찬을 만들면 그 싱싱함과 생명력이 큰 맛이었어요.


호박을 그냥 구우면 살짝 고구마 같은 냄새가 납니다. 익어갈수록 달큰한 향이 코를 간지럽힙니다. 씹을 때 단물이 주륵 나옵니다. 기름을 살짝 두르고 새우젓을 넣어 볶으면 깔끔한 요리가 되지요. 여름 채소 요리에 청양고추를 살짝 넣으며 이열치열 매콤한 맛이 더위에 떨어진 입맛을 자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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