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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hie 다영 Lee Nov 27. 2021

습작

자잘한 사랑의 조각들

파란 글라스로 한쪽 벽면을 채운 작품을 바라보고 있었다. 밖에서 파란 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은 작품이 있는 좁은 복도와 그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의 얼굴을 모두 파란빛으로 물들였다. 어떤 부분은 연하게, 어떤 부분은 더욱 진하게 파란빛은 퍼졌다. 나무와, 새와, 달과 사람의 형상들이 마치 바닷속을 유영하듯 파란 조각들 사이사이로 헤엄치고 있었다. 나는 그 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섰다. 무언가를 주시하고 있기보다 나의 시선도 마치 물 속을 떠다니듯 그저 파란 조각 조각의 경계를 따라 헤엄치고 있었다. 문득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시선을 돌렸다. 한 남자가 조금 떨어진 의자에 구부정하게 앉아 같이 또렷하면서도 갈 곳 잃은 시선으로 작품을 보고 있었다. 창에서 들어오는 파란빛이 얼굴의 곡선을 따라 흐른다. 어떤 곳은 조금 더 선명하게, 어떤 곳은 좀 더 어둡게, 이미 날카로운 그의 얼굴의 형태에 부딪히고 꺾이며 푸른빛은 그의 얼굴을 물들이고 있었다.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하고, 낯설기도 한 그의 얼굴을 마치 작품을 쳐다볼 때의 태도로 한참을 바라본다. 같은 동양인이어서인가,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왜인지 아는 사람 같다는 착각을 순간했다. 나의 동글동글한 이목구비와 얼굴형의 곡선과 달리 이곳의 많은 얼굴들은 꽤 도드라진 형태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더욱 나와 비슷한 곡선이 반가웠던 것도 같다.

"제이, 이쪽으로 와주시겠어요?" 때맞춰 나타난 면접 담당자의 까랑한 목소리가 물 속에 있는 것처럼 고요하던 공간을 깨트린다. 어떠한 표정의 변화 없이 잠깐 남자의 시선이 이쪽을 잠시 향하는 것을 느끼며 면접자를 향해 걸어갔다. 고요한 공간에 둔탁한 나의 구두소리가 울린다. 


그와의 조우는 항상 낯선 곳에서 갑작스레 이루어졌다. 어느 오후의 카페,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창가의 노란 쇼파에 기대듯이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낯선 언어들이 음악처럼 흐르는 곳에선 따뜻한 햇볕에 등을 내맡기고 있자니 졸음이 밀려왔다. 저들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무의식 중에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한참을 그 곳의 햇살과, 간질거리는 언어들을 덮고 잠이 들었다가 허기에 눈을 떴다. 주머니에 있는 동전들을 짤랑거리며 점심에는 어느정도의 사치가 가능할지 가늠해보았다. 다시 복작거리는 거리를 걷는다. 이들에게 이방인인 나는 분명히 존재하면서도 투명하다. 인파를 뚫고 이리저리 작은 가게들을 기웃거리며 사지도 않을 물건들을 들었다가 이내 내려놓는다. 인파가 가득한 거리를 이리저리 유영하며 길의 작은 가게들로 습관적으로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한다. 점점 이 낯설고 덩어리진 인파와, 반복되는 상품의 연속인 가게들 안에서 생각없이 물건을 집어들고 내려놓기가 지겨워질 때쯤 나는 거리로 잰 걸음으로 뛰쳐나오듯 툭, 걸어나왔다. 그때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그 얼굴을 마주했다. 

살짝 놀란 표정. 한동안 멈춰서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 거리에서, 낯선 언어들과 시선들로 가득한 이 거리에서 우리는 유일한 낯 익은 얼굴을 마주하며 살며시 미소지었다. 한참을 걸었다. 여름의 푸른 강가를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잔디밭에 누워 함께 책을 읽기도 하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잠에 들었다. 그러다가 잠깐 눈이 떠지면 슬쩍 그의 잠든 얼굴을 훔쳐보곤 했다. 강가를 타고 불어오는 바람이 머리카락을 미세하게 헝클어도 간지럽지도 않은지 그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아직 11월인데도 한겨울이 무색하게 눈이 내린다. 입자가 굵은 눈을 그저 맞으며 입은 코트를 더 세게 여민다. 한걸음 옮길 때마다 가까워지는 모습이 이제는 제법 익숙하다. 아직 나를 보지 못한 것 같다. 온전히 혼자인 그에게 가까워져가며 한편으로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그 모습을 오래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내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는 웃어보였다. 그가 혼자일 때의 얼굴은 내가 마주하는 얼굴과 참 다르다. 나는 자주 푸른 창 앞에서, 또 잔디 위에서, 내가 바라봤던 그의 온전한 혼자된 얼굴을 상기한다. 내가 없는 공간의 그는 어떤 얼굴일까. 나는 그의 혼자된 얼굴을 참으로 좋아했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자주 얼굴을 마주하기보다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함께 걷는 날들이 많았다. 입자가 굵은 눈들이 머리에 소복히 쌓여갈 때마다 몸을 조금씩 털어내며 덜컹거리는 다리를 건너 익숙한 식당으로 향한다. 향신료가 짙게 배인 음식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차를 마시며 어느덧 우리와 상관없어진 창 밖의 흩날리는 눈을 바라본다. 붉고 어두운 조명이 켜진 이 공간에서 커다란 창을 내다보며 위에서 아래로 포슬포슬 내려오는 눈이, 마치 영화관 안에 있다는 기분을 들게 하기도 하고, 큰 기계 안에서 조종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많은 거리를 걷고, 이야기를 나누고 그는 또 낯선 곳으로 떠났다. 이번에는 해가 지지 않는 곳으로 간다고 했다. 이곳은 해가 긴 만큼이나 어둠도 긴 곳이라고, 그는 그게 싫다고 했다. 우리는 담담히 악수를 나누고 이번에는 다른 방향으로 얼굴을 돌려 걸어갔다. 또 그렇게 혼자된 거리를 걷다보면 어디선가 기대하지 못한 곳에서 익숙한 얼굴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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