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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hie 다영 Lee Nov 27. 2021

기록

페소아 <불안의 서>를 읽고 적어본 몇일의 기록

03 JULY 2021

Scatter minded,

얼마 전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친구가 딱 이 표현을 찾아 머릿속을 뒤적이는 것 같아 빼꼼 그 머리 속을 들여다보고는 두 손가락으로 가볍게 단어를 골라냈다. “Scatter-minded? 그 사람, 되게 scatter minded 하다고?” 딱히 한국어로 표현되지 않는 이 단어를 들고 “맞아, 그만한 단어가 없지”하며 우리는 마주보고 웃어보였다.

요즘의 나의 상태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바로 이 단어인 듯하다. 뭔가 정돈되지 않고 온갖 잔상들이 머리와 삶, 생활의 구석구석에 흩뿌려져 있다. 마치 매일 아침저녁으로 입어보고 던져놓는 옷가지들처럼 바닥에 그 형태 그대로 쌓여서 누군가 자신을 집어 고이 접어서 정돈해주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바닥 이곳저곳에 채이는 옷가지들처럼 머릿속을 채우는 이런 단상들은 가끔 다시 돌아와 우연치 않게 발에 채이기도 하고 한참을 잊혀져 지내다가 어느 날 여유가 생길 때 다시 정돈되어 일기장의 한켠으로 고이 접혀들어가기도 한다. 언젠가 다시 필요해지기까지 한동안 잊혀져 지내는 것은 똑같겠지만. 한동안 일기를 쓰지 못했다. 유독 정신이 이리저리 흩어져 발디딜 틈 없이 과부하 상태가 되어 몇달을 보낸 것에는 그게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정돈되지 못한 마음이 나를 점점 바보처럼 만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나마 대화를 나누고 말로 생각들을 풀어낸 날은 조금 견딜만 했지만 또 이내 정리되지 못한 생각들은 어디론가 쳐박혀 있을게 뻔했다. 마치 폭식증 환자처럼 수많은 책과 영화들을 봐댔지만 어딘가 체한듯 답답한 기분이 든다. 어쨌든 무엇이든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의식의 흐름대로 지저분한 생각들을 토해낸다. 


23 JUNE 2021

혹자는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나는 사람은 매순간 변화하는 유기적인 존재라고 느낀다. 물론 각자가 정의하는 ‘변화’ 또한 다 달라서 어쩌면 우리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수도 있겠다. 누군가는 나를 지나치게 정돈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어딘가 항상 엉성한 사람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누구에게는 항상 여유없이 바쁜 사람이 되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구에게는 게으른 사람이기도 하다. 누군가에게 나는 참 다정한 사람이지만 또 어떤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야속한 사람이기도 하겠지. 

어떤 때 나는 지나치게 강박적이고 그러다가 한번 무너져내리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피 한방울 안 나올 것처럼 냉철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또 대체로 나는 연약하고 감정적인 사람이다. 대체로 나는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라 생각하지만 자기혐오를 가장 강력한 연료로 삶을 진전시켜 온 사람이다. 누군가가 나에 대한 평가를 내릴 때, 혹은 내가 누군가에게 나에 대해 설명할 때 항상 그 기준점이 궁금했다. 그 기준점이 모두에게 달라서 나는 항상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표현하는 것이 어려웠다. 매순간 나는 내가 어렵고 낯설게 느껴진다. 스스로에게 조차 낯을 가리는 사람이라니, 참 답이 없다. 


26 JUNE 2021

어릴 적에 해외에서 몇달을 지내다가 한국에 들어오면 내가 너무 잘 알던 사람들이, 장소들이, 또 관계들이 너무 변해있을 때가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혼자 멀리 떨어져 있는 시간동안 나는 좋은 것만을 기억하고, 그 가운데 많은 것들이 내 취향에 맞게 미화되었다가 실제로 그것들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느꼈던 낯섦이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실제로 사춘기 시절 소년 소녀들의 변화는 너무도 빨랐고 그들의 마음 또한 변덕스러웠다. 2000년대 초반의 한국 사회 또한 그만큼이나 격정적으로 변화하던 때였고. 매년 여름마다 너무 낯설어져 버린 익숙한 것들에 당황하지 않은 척 다시 적응하고 맞춰나가는 과정은 정말이지 고역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인가, 나는 아직도 익숙한 사람들을 만날 때조차 매번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릴 때가 많다. 이제는 완벽하게 당황하지 않는 법을 터득해서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태반이지만, 유독 속이 많이 울렁거리는 날 그래도 수월하게 만남을 잘 이행하고 돌아오는 길이면 ‘오늘도 잘 속아넘겼다’라는 생각에 괜한 죄책감과 뿌듯함을 느낄 때도 많다. 


01 JULY 2021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기에 또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이 말을 마음에 수도 없이 새기는 한달이었다. 알 수 없는 삶의 수많은 갈래길 앞에서 갈팡질팡 헤맬 때, 실패한 관계의 잔해 앞에서 비참한 마음이 차오를 때, 특별히 이룬 것도 없이 넘어가는 달력과 늘어나는 숫자들을 힘없이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느껴질 때, 깊이를 알 수 없는 무력감 속에서 나를 건져내기 위해서 자주 외웠던 주문이기도 했다. 그래, 나는 아무것도 없어! 그렇지만 또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어.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이제부터 아무거나 내가 원하는 걸 할 수 있어!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지만 혹시 알아? 이러다가 강동원이랑 결혼할 수도 있는거지. 공허하게 비어버린 마음에 차마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도 부끄러운 공상들을 채워가며 가라앉는 마음에 한껏 바람을 불어넣었다. 어쩌면 살아간다는게 끊임없이 좌절하고 깨어지는 마음에 헛된 희망을 부어넣는 의미없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소망함에는 힘이 있다. 그것이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그 희망을 부어넣는 순간만큼은 위로를 받기도 하니까. 


30 JUNE 2021

‘어쩔 수 없지 뭐.” 

올해 내가 가장 많이 한 말이다. 체념과 포기, 또 순응의 그 어딘가에 있는 이 말을 나는 종종 나에게, 또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했다. 그 다음에는 할 수 있는 것들을 했다. 불안 지수가 높아서 곧잘 강박으로 흐르고, 내 뜻과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지나친 분노와 비참함을 느끼던 과거에서 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큰 긍정적인 변화라는 생각이 들어 뿌듯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래도 전에 봤을 때보다 많이 안정되어 보인다는 말을 했다. 그 또한 기분이 좋은 말이면서도 묘하게 서글프다. 


05 JULY 2021

A: 있잖아, 몇년 전에 너가 일기를 소설로 쓴다고 했었잖아.

B: 네네 옛날엔 그랬죠. 요즘은 안 그래요, 스스로 솔직해지는 법을 배웠거든요.

A: 응응, 근데 소설로 썼을 때는.. 그 심리가 어떤 거였어? 뭐랄까.. 나는 무언가를 온전히 픽션으로 써 낸다는 게 좀 상상이 안가. 

뭐랄까, 작가들도 픽션으로 쓴다고 해도 언젠가 어디선가 그들이 경험하고 주워들은 이야기들을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거 아니야? 

그러면 그게 진짜 픽션인가? 그래서 나는 너가 소설로 일기를 쓴다는 것의 로직이 조금 궁금했어.

B: 아~ 하하 그거, 음.. 글쎄요. 저는 좀 두려웠던 것 같아요. 활자로 쓰여진다는 건 결국 언젠가 누군가에게는 읽혀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잖아요.

근데 저는 그걸 생각만 해도 뭔가 끔찍하고.. 수치스럽잖아요. 그래서 저 나름대로 암호화를 해서 완전한 픽션으로 만든거죠.

예를 들면 제가 강아지인거에요. 근데 그냥 강아지가 아니라, 크림스프 강아지에요. (웃음)

A: 크림스프? 

B: 네네,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크림스프로 만들어진 강아지요. 그래서 크림스프로 된 강아지가 막 다니면서 이런저런 일들에 처하기도 하고.. 그런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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