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맛
이민호
1.추운 겨울 할머니께서 마당 한 귀퉁이에 솥 걸어 놓고 끓여주신 시원한 '소고기 무국', 무와 파 그리고 소고기와 콩나물이 가득 들어가 시원 매콤했다. 뜨거운 음식이 시원할 수 있음을 알려준 음식이었다.
2.할머니께서 동화사 케이블카 앞에서 장사를 하기 위해 매일 아침 무쇠솥에 고디(다슬기)를 삶으셨는데, 옆에 쪼그리고 앉아 탱자 나무 가시로 빼먹던 '고디', 장작타는 냄새와 짭쪼롬한 고디의 조합은 일품이었다.
3.철 없던 시절 주인 없는 과수원에서 몰래 서리해먹었던 '사과', 맛 보다는 스릴과 키득거림으로 먹었던 사과였다.
4.친구들과 문방구 앞 연탄 화로에 구워 먹던 '소시지'와 '쥐포', 따뜻한 화로 앞에서 집게로 원하는 굽기로 조리해서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5.들판과 강가에서 어린 친구들과 구워먹던 '밤', 실컷 뛰어놀다가 출출한 배를 채우기 위해 불을 지폈던, 재미도 맛의 일부였다.
6.어머니께서 라면에 밥과 김치를 넣고 뜨겁게 끓여낸 '갱시기', 매콤하고 짭쪼롬한 라면에 푹 익은 김치와 멸치를 넣고 걸쭉하게 끓여주셨는데 온 집 안에 냄새가 가득했다.
7.대학생 시절 선배와 대낮에 짬뽕, 탕수육과 함께 먹었던 '빼갈'과 '이과두주', 생전 처음 먹어보는 높은 도수의 술은 휘발유에 가까웠다. 지금은 나에게 가장 깔끔한 술로 자리잡았다.
8.호주 시드니 타운홀에서 먹었던 '투나샌드위치'와 달링하버에서 먹었던 '스테이크'와 '롱샷커피', 같은 음식이었지만 분명 한국의 것보다 더 묵직했다.
9.장모님께서 일일이 수작업해서 만들어주신 '손두부'와 '도토리묵', 세상에서 가장 밀도가 높은 음식 같다. 아니 가장 높은 음식이다. 국내산 100% 재료를 정성 100%로 누르고 눌렀기에 물리학적으로 가장 밀도가 높다.
10.영하의 날씨, 마로니에공원 420장애인투쟁 현장에서 먹었던 '뱅쇼', 깡깡 언 몸을 녹아내리는 느낌을 받았다.
11.추운 겨울, 길을 걷다가 아무런 이유없이 무심코 먹게 된 '어묵', 길 가다 돈 주운 기분이랄까.
12.일본 오사카 여행에서 먹었던 '가정식 백반'과 입천창까지면서 먹었던 뜨거운 '오코노미야끼' 짭쪼롬하고 감칠맛 나는 가정식. 헛점이 없었다. 식히지도 않고 먹다 입천장 다 까졌지만 뜨거움도 맛의 일부였다.
13.일본 동경 여행을 하면서 완전히 지쳐버렸을때 먹었던 '하이볼', '생맥주', '커피', 마시는 도중에 죽어도 상관없을 정도의 맛이었다.
14.동대문 시장 인근에서 밴드 동료들과 동틀까지 술 마시며 먹었던 '순대볶음', 새벽 장사꾼들의 분주한 움직임과 옆사람 이야기도 잘 들리지 않는 소음 때문에 마구마구 먹게 된다
15.친구 손에 이끌려 함께 먹었던 매콤알싸한 '마라탕'과 향긋한 '연태고량주', 가게 전체가 평소 느껴보지 못한 향으로 가득 차 있는데 연태고량주 향이 모든 것을 제압한다.
16.흰 눈 펑펑 내리던 날, 평택역 인근 재홍분식에서 먹었던 '즉석떡볶이', 휠체어도 나아가기 어려운 길을 뚫고 식당문을 열었을 때. 하얀 김이 가득했다. 시간에 따라 숨 죽어가는 재료와 빨갛게 익어가는 재료들. 인생 떡뽁이다.
17.장애인 체전 휠체어 달리기 부문 참여를 앞두고 체육관에 모여 먹던 '튀김우동(컵라면)', 운동하고 먹으면 무엇이든지 맛있다. 음식은 상황이다.
18.한 겨울 계절 학기로 대학 기숙사에 남아 있으면서 인천에서 직접 공수해와 사감님과 쪄먹었던 '킹크랩', 인스턴트에 쩔어있던 육신을 정화했던 첫 킹크랩. 기숙사에 입주 학생이 아주 소수여서 가능했다. 외로운 기숙사에서 도란도란 이야기 나눈 것이 기억난다.
19.출근 후 사무실에서 업무를 시작하며 마시는 노란색 '믹스커피', 자동차 시동거는 느낌이다.
20.겨울 쫀득쫀득하게 돌아오는 '과메기'와 탱글탱글한 가자미로 물없이 자박하게 만든 '물회', 말이 필요없다.
21.제주도 여행에서 먹었던 향기 좋았던 '말고기', 생전 처음 느끼는 육향과 색깔이 매우 진했다. 커피로 치면 에스프레소다.
22.차분한 분위기가 깔린 호텔 식당 조식 '모닝빵'과 '블랙커피', 그날의 여행을 시작하기 위한 준비 과정으로 모두 차분하다. 덕분에 음식에 집중할 수 있다.
23.대학 시절 교수님이 사주셔서 생전 처음 먹었던 '홍어삼합', 얼굴에 있던 모든 구멍으로 암모니아가 튀어 나오는 느낌이었고 신세계였다. 지금은 없어서 못 먹는 게 되어버렸다.
24.대학교 시절 차 안에서 먹었던 송탄 미군 기지 '햄버거', 송탄 미군 기지 앞에 햄버거집이 즐비하다. 차에 탄 채로 시켜서 바로 먹는 맛이있다. 국물 질질 흐르는 칠리버거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25.어머니가 손수 반죽해 끓여주셨던 '수제비'와 '칼국수', 멸치로 우려낸 육수와 포슬포슬한 감자가 듬뿍 들어가 매우 담백했다. 마무리는 집간장으로 만든 양념장이다.
26.스트레스 가득할 때마다 시간내서 먹는 '따로국밥', 그나마 할머니가 끓여주시던 '소고기국'과 가장 흡사하다. 밥 대신 국수로도 먹을 수 있어서 일석이조다. 할머니의 향수 탓인가. 스트레스가 말끔히 사라진다.
27.생일날 옆지기가 최가게케잌에서 사다준 '딸기케잌', 걸어오다 넘어져서 다 찌그러져버렸지만 그게 더 감동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