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현재의 모습으로 과거의 모습을 예측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런 예측이 무조건 100% 맞아떨어지는 경우는 흔치 않다.
지금이야 그냥 먹고살만한 모습으로 남의 집살이가 아닌 부모님도 집을 사셨고 나도 집을 사서 아주 평범하게 살고 있기에 무난하게 성장했을 거란 예측과 달리, 나의 어릴 적 과거는 그리 녹녹지 않았다.
지금은 초등학교로 불리지만 예전에는 국민학교라고 불리던 때가 있었다.
물론 나는 국민학교 출신으로... 콜록콜록...-_-;;
국민학교 5학년 때인지 6학년 때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런 생각을 해봤었다.
"나는 왜 하필, 이 집에서 태어났을까...?"

"친부모가 날 버렸나?"
기억도 안 날 만큼 아주 오래된 그때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나에게 제2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나는 현재 살고 있는 도시에서 태어났으나 3살인지 4살인지 모를 나이에 부모님과 함께 상경한 서울은 나의 국민학교와 중학교까지의 추억이 설인 도시이기도 하다.
집안 형편은 불우했고, 속히 달동네 비슷한 곳과 번화가지만 외진 곳에 위치한 다락방 같은 곳, 비만 오면 눅눅하고 습한 반지하에서 주로 생활을 했었다.
경제능력이 부족했던 아버지와 달리 생활력이 굉장히 강하셨던 우리 어머니는 그래도 어떻게 해서든 살아보겠다며 우리 가족을 지켜내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우리 어머니는 '초인(超人)'이었지 않았을까.

"엄마는 강하다!"
Q1. 어릴 적 집이 상당히 어려웠던 것 같은데, 어느 정도였죠?
저와 제 동생은 굉장히 어렸을 때였는데, 밤 8시만 되면 잠을 재우셨죠.
성장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머니에게는 다른 꿍꿍이가 계셨어요.
저희가 빨리 잠들어야 당시 아버지가 야간에 일하시는 곳으로 어머니도 나가실 수 있으셨거든요.
잠든 저희를 확인하시고 그렇게 어머니도 아버지에게 가려고 했으나, 혹시 저희가 중간에 깨서 어머니를 찾으며 집 밖으로 나올 것을 걱정하셨나 봐요.
어느 날 정말 그런 일이 벌어졌고, 잠에서 깬 제가 어머니가 집에 없다는 것을 알고 걱정되는 마음에 어머니를 찾기 위해 현관 밖으로 나서려고 했지만 문이 열리지 않더군요.
알고 보니 자물쇠로 문을 잠그고 가신 거였죠.
또 하루는 집에 쌀이 한 톨도 없었는데, 옆집을 기웃기웃하시며 쌀 한 줌을 빌려오시고 밥을 지어 우리에게 주시며 정작 본인은 굶고 계셨던 일들...
참, 그때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네요.
Q2.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우리 아버지는...
고생도 많이 하시고 늘 외로웠을 것 같아요.
외롭다는 말이 평소 주변에 아무도 없고 늘 혼자 지내면서 느끼는 외로움이 아닌, 자신의 생각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 상황에서 이해해줄 사람이 많이 부족했던 거에 대한 외로움을 느끼셨을 것 같아요.
아버지는 저를 정말 많이 사랑해 주셨고, 여기저기 많이 데리고 다니셨죠.
일이 있을 때 시외로 나갈 일이 있으면 꼭 저를 데리고 가셨고, 쉬는 날에도 서울 근교로 저를 많이 데리고 다니셨어요.
임진각과 북한산은 정말 많이 갔던 거 같아요.
집에 아직 사진도 많이 있는 걸 보면, 우리 아버지와 저는 함께 한 날이 정말 많았던 것 같아요.
그런 영향이 지금 제가 큰 아이와 갑자기를 데리고 주말이면 나가게 된 이유이지 않을까 하네요.
한동안 백수로 지내시던 아버지가 현재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 취업이 되어 우리 가족은 생이별을 해야 했다.
건설업을 하시던 아버지는 건설소장이 되어 나름의 열정으로 일을 하셨고 서울에 남은 어머니와 나, 동생은 아버지의 빈자리를 갈망했었다.
국민학교 2학년 때 우리는 은평구 녹번동에서 중구 을지로로 이사를 가서 살았다.
데모라는 것을 태어나 처음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시기였는데,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대학생 형, 누나들이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독한 최루탄 가스 속에서 돌과 화염병을 집어던지던 모습이 생생하다.
명동은 내가 살던 집 옆이었는데, 명동성당이 우리 집에서 도보로 약 10분 정도에 위치해 있었고 우리 집과 명동성당 사이에 한 종합병원이 있었다.
시위 중 전경에서 밟혀 죽은 대학생 누나의 시신이 그 병원에 있었고, 이 시신을 놓고 치열한 시위가 벌어지고 있을 때였다.
당시 친구들 사이에 비비탄 장난감 총이 유행했었는데, 편을 구분할 때도 투쟁하는 '정의파'와 이를 저지하는 '전경파'로 나눠서 비비탄 총 싸움을 하는 게 보통이었다.
친구들은 최신 비비탄 총을 가지고 영락교회 놀이터로 집결하곤 했는데 나는 항상 빈손이었다.

"엄마가 총을 안 사줘..."
Q3-1. 왜 총을 사지 않고 빈손으로 친구들을 만났나요?
정확하지는 않지만 당시 비비탄 장난감 총 가격이 한 개당 1만 원에서 비싸면 2만 원~3만 원 했죠.
지금이야 1만 원이면 별거 아니라고 생각될 수 있지만 당시 1만 원이면 서민들에게는 엄청 큰돈이었어요.
지방으로 가 계신 아버지를 대신해서 우리를 책임지셔야 했던 어머니는 청소일을 하셨는데, 하루 일당이 2~3천 원이셨으니까 비비탄 총을 선뜻 사주신다는 것은 정말 큰 결심을 해야 되는 일이었죠.
사달라고 떼쓰고 조르고... 엄청 짓궂게 어머니를 괴롭혔죠.
Q3-2. 안타깝지만 끝내 안 사주셨나요?
몇 날 며칠을 울고 불고, 단식투쟁부터 공부도 안 하겠다며 말도 안 되는 떼를 썼어요.
안 사주면 집을 나가겠다는 협박성 투정을 부리다가 파리채로 엄청 맞았던 기억도 납니다.
전에 '갑자기, 내리사랑'편에서 우리 집은 자식이기는 부모가 산다고 했잖아요.
그때 딱 한 번, 어머니가 저에게 져주신 건지 모르겠지만 그때 한 번 이겨봤죠.
눈물을 머금으시고 그나마 저렴했던 7천 원짜리 비비탄 장난감 총을 사주셨어요.
철없이 그냥 짜릿했죠...ㅎㅎㅎ
전학을 무척 자주 다녔지만 그때 이사를 가던 느낌상 이번이 왠지 정말 서울에서의 마지막 이사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을지로에서도 여러 번 이사를 했지만 을지로 마지막으로 살던 곳에서 우리가 이사한 곳은 서대문구에 있는 무악재라는 동네였다.
반지하였지만 태어나 처음 내방이라는 것을 가져본 순간이다.
10평도 안 되는 작은 방에서 온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살다가 인생 처음으로 내 방을 갖게 된 것이다.
행복할 것이란 기대와 달리 그곳은 우리가 처음 서울살이를 했던 녹번동의 기억처럼 좋지만은 않았다.
아버지는 주말이 되면 지방에서 우리가 살던 서울로 올라오셨는데, 오실 때마다 어머니와 불화가 생겼다.
그 이유에 대해 말할 수는 없지만 부모님의 다툼은 잦았다.
부부싸움을 말리는 자식의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유쾌하거나 보람된 일은 절대 아니라는 거다.
그때 참 속으로 많이 울었던 기억이 있다.

"나를 왜 낳으셨나이까..."
Q4. 당시 부모님이 자주 다투신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가난이죠. 가난.
저에게 사춘기가 막 들어설 때였던 것 같아요.
돌아보면 저의 질풍노도 시기는 사춘기가 왔다고 부모님께 반항하고 삐뚤어진 행동을 하면서 크게 저항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많은 삭였죠.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할까, 하필 우리 집에서 태어났을까...'
이사도 많이 하며 전학도 여러 번 다녔어요.
그래서 초등학교 때 깊이 사귄 친구가 없어요.
친해질 만하면 전학 가고, 가까워질 만하면 전학을 가야 했기 때문인데 단 한 번도 그런 부분에 대한 불평을 부모님께 표출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하지 못했어요.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자괴감을 느끼시며 저에게 미안한 마음 가지실까 봐...
그러다 기쁜(?) 소식이 아버지에게 들려왔다.
지방에 집을 마련했다며 우리 가족이 모두 함께 살 수 있다는 소식이었다.
몇 년을 마치 이산가족처럼 지내던 우리 가족은 아버지만 믿고 서울에서 지방으로 이사를 갔다.
그곳이 지금 살고 있는 바로 이 도시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평범한 행복을 누리던 터, 나에게 불의의 사고가 일어났다.

"이제 살만한데... 왜 나에게만..."
교통사고를 당한 나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고 당시 병원에서도 부모님께 마음의 준비를 하라며 위로를 전했을 정도다.
어머니께 들은 내용은 아버지는 장례식장을 예약하기 위해 분주하셨고 어머니는 내 곁을 지키고 계셨단다.
놀랍게도 장례식장으로 가야 했던 내가 기적처럼 다시 깨어났다.
정신이 들고 회복이 어느 정도 되었을 때,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Q5-1. 아버지 얼굴을 보고 놀라신 이유가 있나요?
저희 아버지는 굉장히 고집도 강하시고 어떤 일을 담당하시면 최선을 다하시려고 노력하세요.
그리고 사람을 좋아하셔서 남에게 싫은 소리를 절대 못하시는 분이죠.
욕심도 없으셔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퍼주시는 성격이세요.
그러니 얼굴이 얼마나 온화하시겠습니까?
젊은 나이에 결혼하셔서 저를 낳았기 때문에 주변에서 농담으로 아들이랑 같이 늙어 간다는 소리도 들으셨어요.
저의 교통사고 이전, 팽팽한 이마에 탄력적인 피부는 그 누가 봐도 부러워할 만큼 좋으셨던 분이세요.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아버지 이마에는 주름이 한 줄, 두 줄... 팔자주름에 까무잡잡해진 피부...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죄송했어요.
Q5-2. 그렇다면 어머니는 어떠셨나요?
어머니는...
전 어머니라는 말을 되뇌면 눈물이 먼저 흘러요.
제가 나이를 먹으며 남성 호르몬이 줄어들고 여성 호르몬이 많아져서 그런 건지, 어머니라는 단어만 봐도 뭉클해요.
정말 힘들게 살아오셨거든요.
병원에 있을 때 매일 같이 제 손을 잡으시고 '괜찮아', '건강해질 거야' 그리고 이 말 때문에 남들이 모두 잠든 야밤에 베갯속에서 남몰래 눈물을 훔쳤죠.
'아들, 사랑해.'
그때 생각하면 진짜... 불효자는 웁니다라는 말이 떠올라서 더 이상 말을 못 하겠네요.
결혼을 할 때 보통 신부와 신부 쪽 어머니는 기쁨과 서운함이 결합된 축복의 눈물을 흘린다.
내가 결혼하던 날, 장인장모님도 우셨겠지만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펑펑 눈물을 흘리셨다.
기뻐서?
서운해서?
물론 그런 이유도 있으셨겠지만, 주된 이유는 아닌 것 같다.
배 아파 낳은 아들이 불우했던 과거를 뒤로하고 나름 잘 성장해서 새로운 가정을 꾸리며 살게 된 것에 대한 고마움일 것이다.
죽다 살아난 아들, 살리겠다는 생각으로 그나마 남아있던 재산을 처분해가며 오직 나 하나 살리시겠다고 살아오신 분들.
맏아들에게 기댈 수 있는 최소한을 바라셨던 우리 부모님.
결혼을 하고 애들을 낳아 살아보니 내가 살아왔던 과거의 그 아픔들이 이제는 값진 추억이 되었고, 내 앞에 주름진 이마를 보이시는 부모님의 마음을 어느 정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현재 나는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중학교 이후로 단 한 번도 이렇게 불러보지 않았다.
"아빠..."
그리고 아직까지도 철없이 어머니를 부르는 호칭.
"엄마..."
정작 제가 부모가 되어보니,
저를 사랑하셨던 마음과 노고, 희생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지금은 아주 평범하게 부족함없이 살고 있다.
예전 내가 왜 이집에서 태어났어야 했는지에 대한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시간이다.
부모님이 계시고 내 동생이 있으며, 결혼하고 처갓집 가족들과 집사람 그리고 우리 두 아들들을 만나기 위해 그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