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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침 편지

손순하게

아침편지

by 하민혜

안녕요. 잘 잤나요? 고단했던지 아기 자세로 깜빡 잠에 들었어요. 퍼뜩 깨었는데 지글거리던 허리 통증이 가셨어요. 가책을 느낀 제가 그런 모양으로 잠깐 몸을 쉬게 했나 봐요.


어젠 글로(glo)에서 줌 강연을 했어요. 꼭 한 번 공지하고 말았지요. 아이들 방학에다 매일 출근하고 보니 하루하루가 금세 지나요. 아침 편지만큼은 새벽 일상이라 멀끔하지요.


글을 쓰려고 앉았는데 물고기 모양의 아름다운 도시, 폼페이가 문득 생각났어요. 마치 인생의 뒷모습처럼 남겨진 도시를 걸었더랬어요. 괜히 매무새를 다듬었던 기억이 납니다. 뿌옇게 남은 폐허는 제게 겸손한 자세를 요구하는 것만 같았어요.


부유한 가문의 집으로 추정되는 별장을 지나 작은 집, 병원, 목욕탕, 식당, 매음굴과 술집까지. 2천 년 전이라도 지금과 다를 게 없었어요.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했고 18시간 만에 뜨거운 가스와 잿더미로 묻혀버렸다지요. 거대한 타임캡슐처럼 모든 게 화산재 아래 갇히고 말았어요.


석고를 부어 보존하고 있는 사람의 형상이 있었어요. 공포감이 그대로 전해지는 모습이에요. 최후의 날인 그날의 두려움이 생생합니다. 2천 년쯤 지나면 내가 사는 이 도시는 어떤 모습일까, 그처럼 보존되긴 힘들겠지요.


늦은 저녁 강연에는 책 <킹크>를 들고 무의식에 관해 이야길 나눴어요. 전지전능한 신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어요. 사람이 생각하는 모습과 이름은 아닐지 몰라도, 나와 지금 제 팔에 기댄 고양이에도 신의 조각이 들었을까요.


내 삶을 내가 창조한다는 의미로 우리 모두에게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책은 말해요. 다만 신은 이 몸만이 아니라 다른 몸은 물론이고, 베수비오 산에도 들었다고 봐야지요. 그러니 '나'의 의도만이 신의 뜻이 아니고, 벌어진 세상 전부가 신의 뜻이라면 어떤가요.


말하려는 것은 지금 내게 주어진 삶과 '싸우는' 것은 무모하고 오만한 게 아닐까, 싶어서요. 만일 무언갈 실패했다면 고개를 끄덕여야만 다음을 결정할 지혜와 힘이 생기니까요.


어느새 금요일이라요. 한 주간 애썼네요 우리, 저녁엔 26주 차 밤편지를 적어 발송하렵니다. 손순하고 행복한 오늘 보내시길.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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