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는 재료다. 메모는 준비다. 삶을 위한 예열 과정이다. 언젠가는 그중 가장 좋은 것을 삶으로 부화시켜야 한다. 어떻게 살지 몰라도 쓴 대로 살 수는 있다. 최선의 것을 따라 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자신 안에 괜찮은 것이 없다면 외부 세계에서 모셔 오면 된다.
- 정혜윤, <아무튼 메모> 중에서
기적거린 메모지를 들췄다. 후드득 떨어지는 단어들과 적어 내리지 못한 여백에 그간의 혼란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따금 써 내려간 단편, 가상의 인물로 시작한 이야기도 음침하게 구석져 있다. 상상 속에 소름 돋을 만큼 몰입했던 순간들. 길 잃은 아이처럼 이곳저곳 기웃대는 마음들이 애틋하게 나를 올려본다. 왜 하필 글이었을까.
어릴 적부터 밖으로 나동그라지기 바빴다. 다리며 팔이며 성한 날이 없을 만큼 내쳐 달리곤 했다. 어푸러지면 피가 철철 나도 곧장 일어났다. 빨개진 두 눈을 있는 힘껏 누르며 눈물을 참았다. 그렇게 내 안에는 거들떠보지 못해 미성숙한, 내밀한 존재가 살게되었다.
반복적으로 내달리다 절망과 권태에 어지러우면 나는, 책을 더듬어 만지작대곤 했다. 귀가 어두운 엄마가 책으로 도망친 것처럼, 세상이 깜깜할 때면 책상에 앉아 불을 켰다. 그렇게 읽고, 읽어 내려가다 보니 어느 날엔 무어라도 쓰고 싶어 졌을까. 내가 만난 내면의 존재가 더는 숨지 않고 밖으로 나왔으면 좀 더 내뱉었으면, 그저 누르고 살았던 고통에 대한 사죄일지 모른다. 다만 글을 쓰는 지금에 나는 누구가 아닌 진짜 내가 걷는 느낌이다. 그래. 더는 무작정에 뛰지 않는다. 나는 이제야 내 발로 자의로 한 걸음씩 걸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