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관계

말이 그래서 그렇지

변하는 것은 존재가 아니다

by 하민혜
불현듯 예전의 기억들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입 밖으로 꺼내기에는 말들이 너무나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평생 말하기를 단념하려고 했던 칠흑 같은 날들, 벽에다 머리를 찧고서 그 충격으로 하얀 섬광이 보이기를 기다렸던 진홍빛의 날들, 모두들 내가 약을 먹으니 예전의 모습을 거의 되찾은 것 같다고 말했지만 정작 나는 목구멍에 그대로 걸린 약을 내뿜지 않으려고 꾹꾹 억눌렀던 메스껍고 이상했던 날들.
-캐서린 메이 <걸을 때마다 조금씩 내가 된다>



말이 적다는 이야길 노상 들었다. 잡담을 좋아하지 않는다. 설핏 스친다면 알 수 없지만 오래간 보아온 이들은 하나같이 내게 말이 적다고들 이야기한다. 태생이 그러니 싶지만 귀가 어둔 엄마 밑에 어린 시절을 보내서일지도 모르겠다. 내 뜻은 그게 아닌데, 절반만큼의 이해와 절반만큼의 오해가 늘 함께였다. 놀라운 것은 귀가 뚫린 사람에게조차 비슷한 막막함을 느끼곤 했다는 거다. 자세한 경로를 알지 못해도 사람들은 곧잘 자신의 관점으로 말의 길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듯 보였다. 나는 절반도 꺼내지 못한 마음을 외길에 묻어두곤 한다. 그래 말이 부족해서 적은 게 아니다.



사람의 말을 그다지 믿지 않는다. 의식하지 않고 뱉어내는 말이 너무나도 많다. 말의 무게를 실감하지만 나로서는 믿지 않음으로 득도 실도 없는 쪽에 가깝다. 말은 존재를 드러내지 못한다. 하늘에 엷게 깔린 구름이 수시로 변하고 움직이듯 사람의 말은 감정에 따라 다른 모양을 드러낸다. 구름은 구름이지, 하늘이 아니기에 그의 말은 그저 말일뿐 그 사람일리 없다. 잠시 잠깐 그런 모양을 보일 때 내겐 그것이 고정된 것처럼 보일 뿐이다.



한 번은 회사 대표를 소개받고 자리를 가졌다. 그는 다리를 꼬고 앉아 고개며 발끝이며 까뜩거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몸이 묻어난 그의 말은 보나 마나 하염없이 거칠고 무례했다. 혀는 까진 머리만큼이나 짧았고 사람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은 거만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사람의 행동, 말투에서 그의 존재를 보지 않으려 한다. 판단을 내버리고 그저 할 일을 할 뿐이다. 내색하지 않아도 들리는 말을 그의 존재라고 고정하지 않을 때 나는 투명한 창이 된다. 그는 창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게 됨으로 어느샌가 구름이 걷히고 본바탕인 하늘이 드러난다. 까딱거리고 꼬여있던 다리가 다소곳해지며 어슷한 자세와 거만한 눈빛은 온전해진다. 내가 그러듯 그 역시 비로소 서로를 존재와 존재로서 마주한다.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득도 실도 없는 편에 가깝다고 했지만 도리어 얻는 일이 많다. 지금 성선설이니 성악설이니 논쟁을 가져오고 싶진 않다. 애초에 나란 존재가 '말'이 아니고, '생각'도 아니라면 누군가들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뿐이다. 감히 존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지만 내가 보고 듣는 상대는 어디까지나 나의 관점으로 해석한 판단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구름이 아닌 본바탕에 하늘이 있다면 일순간의 구름의 모양을 보고 존재를 고정시키는 어리석음을 피해야 한다. 내가 그렇듯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게 한순간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가족은 서로를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서로를 이미 어떤 모양으로 고정시키고 그 모습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인간의 몸은 스스로 1초에 380만 개의 세포를 교체하고 80일가량이 지나면 그 전의 세포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하다못해 세포도 그리할진대 과연 어제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같은 생각을 하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가족은 역사를 함께 하며 서로를 쉽게 판단하고 해석한다. 과거를 알고 있기에, 그의 말을 들었기에 그는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믿어버린다. 서로에게 온전히 투명한 창이 될 수 없고 자기식으로 미리 판단을 내린다. 그러니 말을 믿지 않는 것은 다만 사랑이 적어서가 아니다. 존재를 존재로서 바라보기 위해, 진실하게 사랑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인 것이다.



누군가가 말을 올릴 때, 특히나 그 순간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돌아 앉아 지금의 나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 사람의 말을 있는 그대로 듣고 있는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정된 실체를 그려놓고 그것을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말이다. 말은 사람을 담는다지만 존재를 담을 수 없다. 사람은 변하지만 존재는 변하지 않는다.

매 순간 변하는 말을 붙들어 그의 존재라고 받들 일 때 우리는 서로를 진실하게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을 사랑할 수 없을 때 그것만큼 가슴 아픈 일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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