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 찾아오는 우울, 불안, 무기력은 반갑지 않은 삼종 세트입니다. 원인은 여러 가지이죠.
사건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지만 모로 돌아가나 기어코 만나게 되는 것은 관념입니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겪는 불안에 담겨있는 관념은 '노력하고 살아봐야 뭐가 달라지나?'였습니다.
시작은 친구였어요. 가장 친한 친구가 줄초상을 맞은 것입니다. 이 문장을 적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습니다.
먼저 친구의 아빠가 돌아가셨고, 일주일 이내에 엄마가 돌아가셨습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예요.
상실에 이어 더 큰 상실. 그야말로 심연 속으로 빨려 들 것만 같은 깊은 시련입니다. 갑자기 또 우울해집니다. 친구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연년생 남매를 키우고 있습니다. 모든 엄마가 그렇듯이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자녀를 키우며 가장 크게 깨달은 것은사랑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막연하게 사랑이란 누군가를 책임지고 보듬고, 좋게 변화시킬 수 있는 그런 어마 무시한 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막상 내가 아이의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고 책임질 수 없다는 무력감을 마주했음은 물론입니다.
결혼 전에 사랑이라 생각했던 만남은 책임지든 책임받든, 마음처럼 되지 않으면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후에 미련이 남는 것은 차치하고 실제로 헤어지면 그만이었죠. 우선, 아이들과는 어떻든 헤어질 수 없었습니다. 아이가 배우고 나아가야 할 인생길에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넘어지고 깨지면서 스스로 일어나는 과정으로 성장합니다. 사랑이라는 이유로 월권한다면 도리어 성장에 방해가 되기까지 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무력하다는 것을 수용하고 인정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너무나 사랑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나는 그 무엇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아프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은 책임지고 변화시키는 힘이 아니라 차라리 수용에 가까웠습니다. 포기와는 다른 느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친구의 줄초상 앞에서 어떤 위로를 할 수 있을까요.
깊은 절망을 느낍니다.
아이가 아플 때에도 잘못된 선택을 하는 때에도 지켜보고 아파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는 걸 인정하는 게 괴로웠습니다. 친구의 슬픔 앞에 그저 함께 슬퍼했습니다. 그 마음에 가 닿기나 할까요. 당사자가 아니고서야 감히 그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는 걸까요. 상상조차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인데 함께 그 느낌에 머물러줄 수 없음이 가슴 아픕니다. 얼마나 외롭고 힘겨울까요.
이틀 전 친구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 후 삼종 세트가 찾아왔습니다. 우울, 불안, 무기력. 핑계이더라도 좋습니다. 깊이 우울을 느끼고 있자니 불안이 느껴지고, 무기력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전엔 도망치기 바빴다면 이젠 습자지가 되어 흠뻑 젖어듭니다.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는 거지'하며 밀어내지 않습니다. 싫지 않다면서 또 얼른 도망치려 애쓰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면 우습기도 합니다.
이러나저러나 우리는 마음에게서 한 발짝도 도망갈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처럼. 우울해도 살아갑니다. 저항하는 마음에서 더한 괴로움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삶이 온통 우울하다는 친구에게 무슨 말이 필요할까요.
'괜찮아.' '힘내.' 따위의 말이 위로가 되지 않다는 것은 진즉에 알고 있습니다.
괜찮지 않은데 뭐가 괜찮단 말인지.
힘내고 싶지 않은데 왜 자꾸 힘내라고 하는지.
때로 슬픔이 괴로움이 아픔이 나쁘다는 우리의 뿌리 깊은 관념은,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을 더 힘들게 합니다.
차라리 아무 말을 말아주세요.
'슬퍼도 괜찮아. 슬픈 게 당연하지. 그 마음을 누가 알겠어. 얼마나 슬플까.'
깊은 물속에 잠기듯 힘을 빼는 게 나을지 모릅니다.
물살과 싸우지 않고 몸을 싣는다면 어느새 파도 위를 올라탈 수 있습니다. 저항하기보단 푹 잠겨도 그만이려니하며 긴장을 풀어야겠죠. 첫 글부터 우울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자니 씁쓸하지만 한 발짝 떨어져 슬픔을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