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놀았어,

꼭 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by 하민혜

"잘 놀았어" 부지불식간에 이 말이 떠오르는 건, 아마 상처로 남았기 때문일 거다. 느닷거리는 말의 뉘앙스, 표정을 상상하고 있다면 실제와 그대로 다르지 않다. 들어선 안될 말을 들은 기분이었다.


학창 시절 나를 좋아했던 친구였다. 친구들과 얽혀 교문을 나서면 그는 반색을 하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학교에서 '카사노바' 같은 별명으로 불린 그는 제법 큰 키에 훤칠한 얼굴, 대찬 목소리로 농담도 잘하고 웃기를 잘했다. 인기 많은 친구가 날 따라다니는 건 나로서 어디즘은 기세등등한 느낌이었다. 그 친구가 곁을 따라다니며 재재거리면, 나는 그 자체로 웃음이 터져 나오곤 했다. 가만 보면 아무도 관심 없을 일인데 나만큼은 이거 봐, 나도 제법 괜찮은 여자야,라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고교 시절의 나는 그만큼이나 수치스럽고 촌스러웠다. 어쩌면 다른 여자에게 한눈 팔린 아빠에 대한 배신감, 불안이 작용했는지 모른다.


고백하려는 남학생들에게 하루 걸러 계단으로 불려 나가던 날엔 어깨가 산만큼 솟았던 기억이다. 쑤걱거리는 뒷말들은 내게 들리지조차 않았다. 공부를 하지 않거나 우정을 쌓지 않은 건 아니다. 다만 자존감이 바닥에 깔린 그때의 소녀에겐 누군가 나서 고백한 일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 가끔 응하기도 했지만 얼굴을 만지려거나 입술을 들이대는 일은 쉽지 않았다. 무엇에든 첫 발을 떼기까지가 어려운 법이다. 외박을 금하는 강단 있는 엄마와 함께였고, 나름에 공부 좀 한다고 입으로라도 쥐어취는 덕이었다.


아빠 핑계를 올렸지만 실은 한창 이성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긴 했을 터다. 욕구가 올랐던 건 아니다만 분명 그즘 누군가가 꺼져있던 방에 스위치를 올린 느낌이다. 춘향이는 이몽룡과 사랑에 빠진 때 열여섯이고, 로미오와 줄리엣의 나이는 겨우 열네 살이다. 나는 열네 살이고 열여섯이고 사랑을 몰랐고, 그저 깜깜하다가 별안간 훤해지니 도리어 눈이 어둔 느낌이라면 딱 맞다. 열띤 고백과 사랑 타령이 오갔지만 무어가 무언지도 모른 채 가슴이 뛰다 말다 했다.


20대 어느 즘 그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여전히 유쾌하고 밝은 목소리였다. 잘은 모르지만 또래보다 군에 늦게 들어간 듯했고 휴가를 나온 참이었다. 당시 나는 서울 예대를 다니는 언니와, 아담한 언니만 한 개와 함께 살았다. 우리는 집 근처 치킨집에서 통닭과 맥주를 주문한다. 고등학생 때 몸은 다 자랐을 테니, 서로가 몇 년 후 달라진 건 삶을 대하는 태도랄지 어른스러운 가짐이면 좋았을 텐데 나나 걔나 그만치 성숙하지 못했다. 섧게 맛본 사랑이란 감정에 대해 어떤 그림조차 그리질 못했던 거다. 어려웠던 건 우정과 사랑을 구별하는 일이었다. 폴짝대고 두근댄 일이 없다. 말이 통하는 친구 같은 남자 사람과 연애하면서 이게 사랑인지, 아닌지 분간할 수 없었다. 당시 나로서는 최초의 비교대상조차 없었던 거다.


치킨을 먹고 2차를 갔다. 그땐 둘 뿐이었고, 푸르스름한 야등 불빛이 아른대는 바에서 칵테일을 홀짝였다. 얼굴이 달아올랐을 테고 욕망이 한껏 끌어 오르던 군인으로선 필사적이었을 터다. 나는 눈치가 산 너머로 사랑에 대해, 욕망에 관해 어쩌면 일면식조차 한 적이 없는 듯 굴었다. 대화 속에 끝없이 폭소를 터뜨릴 뿐이었다. 웃고 떠들다 어느샌가 나는 그와 함께 모로 누워 있었다. 기왕에 기분이 좋기라도 했더라면 좋았을 걸. 사랑을 모르던 때라도 얼핏 느낌이 좋은 적은 있었다. 존재가 하나 되는 느낌, 내가 비워지고 다른 게 채워지는 만족감, 최소한 둘 중 하나라도 갖고 싶었을 테지만 그날은 정말이지 억지로 벗겨낸 브래지어 호크가 덜렁이며 나동 그럴 뿐이었다.

"좋았어?"

"..."


그의 서두름과 거침없는 욕망에 대한 나의 답변이 시원찮았는지 모른다. 엉기는 그를 뒤로 한 채 몸을 돌리고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우리는 어색하게 작별 인사를 나눴다. 그가 복귀라도 하는지 어쩐지 나는 묻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때였다. 버스를 타는 그가 복수라도 하듯 내게 "잘 놀았어"라고 말했다. 나는 뭐라고 대답했을까. 응, 이라고 했던가. 아무 말을 못 했던가. 마지막 장면은 내가 아니라 그에게로 고정된 채 끝이 난다. 버스는 제 갈길을 떠났고 그곳엔 걸쭉이는 표정, 욕망에 응한 여자를 노골적으로 멸시하는 목소리만 남았다.


어쩌면 연락이 올 거라고 기다렸던 듯싶다. 최소한의 자존심이지 당연히 사랑이나 호감 때문은 아니었다.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고 다시 떠올려도 수치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미웠던 건 가만 입을 다문 나였다. 사랑이 뭔지 몰랐을 때라도 함께 있는 순간에 사랑이 아니란 것즘은 알만한 나이였다. 차라리 나도 잘 놀았다 말할 수나 있었으면, 당당하기라도 했다면 좋았을걸. 여자라는 피해 의식에 사로잡혀 그가 나를 골탕 먹였다는 생각에 비참했다. 스스로가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라는 상상이 나를 괴롭혔다.


나는 그 후로도 그를 본 일이 있다. 일언반구 없이 아무렇지 않은 것이야말로 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였다. 서울에 처음 바(bar)를 열었을 때에도 그는 내 영업장을 당당하게 들어섰다. 그 앞에서 친구로서 웃을 수도 있었고 그의 여자친구 곁에서도 기꺼이 미소 지었다. 한데 여전히도 잘 놀았단 말이 귓전에 맴맴 돈다. 그날 밤은 일절 기억에 없지만 그의 멀쑥한 표정과 말투를 기억하는 건 내가 아직도 그때의 나를 수용하지 못한 게 분명하다. 지금까지 나는 자신에게 혐오감을 품었던 그때의 나를 묻어두고 꺼낸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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