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쥐고 있는 두 손

우주의 탄생

by 하민혜

길을 걷다 탱글한 나뭇잎이 무더기로 달린 나뭇가지가 나동그라져 있는 걸 본다. 누군가가 일부러 나무에서 뜯어내 버린 게 분명했다. 작은 아이가 혀를 차며 가지를 들어 올려 흙더미로 휙하고 내던졌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라고 외치면서. 손을 잡고 곁에 서 있던 큰 아이가 내게 말했다. 엄마, 사람은 죽으면 왜 흙이 되는 거야?



얼른 아이가 태어난 순간이 떠올랐다. 끈적끈적하고 피투성이인 작은 생명이 날카롭게 울어댔다. 작고 섬세한 주먹을 어찌나 세게 쥐고 있는지, 그 손안에 무어라도 들었나 궁금할 지경이다. 작은 틈에 내 손가락 하나를 욱여넣어본다. 그러든 말든 아기는 쌔근쌔근 숨을 마시고 내쉬며 꿈속을 헤맨다. 갖은 수를 써도 꼭 쥐고 있는 주먹만은 펼 줄 모른다. 나는 아무리 노곤해도 매일 아기의 잠든 얼굴과 작은 주먹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고요한 새벽, 시간은 멈추고 온 세상에 아기만이 존재했다. 가슴 저린 사랑 노래가 진하게 와닿는 순간이다. 오고 가던 인연에 절절이 눈물 맺는 추억놀이가 사랑인 줄 알았는데, 비로소 진짜 사랑이 뭔지 절로 알 것 같았다. 아기는 내게 반지도, 꽃도, 약속도 건네지 않았지만 나는 그저 나를 모두 내어줄 수 있었다. 넋이 나가도록 울기만 하는 아기를 바라볼 뿐인데 그 어느 때보다 사랑받고 있음을 확신했다.



한 생명을 낳은 순간 사랑은 받는 게 아니라 주는 거라는 걸 몸으로 체득한다.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었던 내가 한없이 사랑을 주는 것만으로 더는 모자라지 않음을 느낀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라면 기어이 전부를, 목숨조차 내놓을 수 있으리란 걸 약속할 필요조차 없다. 그렇게나 확인하고 싶어 안달 났던 마음은 사랑이라는 탈을 쓴 두려움이란 걸 여지없이 깨달았다. 평생 이 아이를 사랑하리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아기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났다. 어느 날엔 아기는 움직이는 모빌을 향해 손을 펼쳤다. 그날 나는 그 아이가 손에 들고 온 게 무엇인지 알았다. 아이가 쥐고 온 건 세상 전부였다. 한 사람은 하나의 우주를 품고 태어난다. 지금 내 손을 잡고 있는 10살 딸아이는 자신만의 한 세상을 안고 있다.



사람이 죽으면 힘이 풀리며 자연히 손을 펼치고 죽게 마련이다. 문득 그 지점에서 우리가 주먹을 쥐고 태어나는 이유가 있구나 생각했다. 설사 악인으로 한 생을 지난다 해도, 인간의 관점으로 보았을 땐 태어나지 않았어야 할 사람이련다 해도. 극단적으로 말해 어느 순간 악인을 자처한다면 어떨까. 그의 생은 적어도 그런 목적인 거다. 가슴을 짓뭉개는 역할, 사람들에게 사랑하지 않음에 대해 경고음을 울리는 역할 따위를 말이다.



누군가에겐 이런 이야기로 귀가 따갑고 못마땅할지 모른다. 곁에도 그런 이가 있다. 악은 악이지, 어떻게 별 수 없다는 것처럼 말하냐 한다. 악은 악임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가슴 찢기는 사연을 모독하거나 아프지 않다고 말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나로서는 사람의 탈을 쓰고 어떻게,라는 이야길 들을 때 속으로 가만, 그야 '사람이니까'라는 생각이 오르는 거다.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전쟁, 그 못지않은 범죄까지도 동물로서는 그 지경까지 끌고 가긴 어려운 일이다.



르네상스의 철학자 P.A 파라셀수스는 인간을 소우주에 비하며 사설을 달았다. 굳이 철학까지 넘어가지 않더라도 아이를 낳아본 엄마라면 생명의 경이를 이해하리라 본다. 한 인간이 벌일 수 있는 악질 중의 악질스런 일들조차 어쩌면 모든 게 가능한 우주로선 당연할지 모른다. 인간이 탄생하는 동시에 그 인간 하나가 꼭 쥐고 나툰 우주라는 건 정말이지 아찔한 일이다. 기필코 세상에 무어든 쥐고 있는 걸 내어주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한 생이란, 그 자체로 처연하고 아름답다.



아이는 나에게 우주의 일부이며 전부이고, 그 자신 스스로 그러하다는 것을 기억하고 살아가길 바란다. 한 생으로서의 책임감을 갖고 용기 있게 자신으로서 살아가길. 아이는 가만 이야길 듣다가 해바라기처럼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엄마 나는 이미 난데, 나로서 살아가라니.

그러네 딸아, 정말 그래.



아이의 말마따나 나는 이미 나로 태어났다. 가뜩 어지러운 우주에서 길을 잃고 그 길에 깜빡 자기 자신마저 잃는 건 아닐까. 바삐 할 일은 완성된 나를 되찾는 일이다. 아이를 낳고 키우기 전까지 나는, 내가 부족한 존재라 믿고 수치심과 죄책감을 숨기며 살았다. 누군가는 완성된 나를 보지 못한대도, 꼭 쥔 주먹을 기억해 내야 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까마득히 잊힌 본래의 존재를 꺼내 당당히 나로서 살고 싶다. 손에 쥔 것을 모두 내어주고 흙으로 돌아가길 꿈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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