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을 밀어낼 때 외로움이 스민다.
혼자임에 대처하는 자세
내게는 병원에 입원하거나 좋을 일이 생길 때 기어코 달려올 친구가 있다. 변함없이 나를 믿어주는 친구, 가족들이 있다. 죄다 쓸려가고 실패한 인생을 살고 있을 때조차도 나를 비난하지 않고 신뢰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 이만하면 외롭지 않아야 하는 걸까?
인간의 외로움, 고독은 태생부터 죽음까지 함께 한다.
누군가가 아무리 외치고 소리 낸들 타인의 마음을 똑같이 느낄 수는 없는 법이다. 내가 원하는 공감은 뼈아프게 진행되는 당장의 고통을 함께 느껴주는 것이다. 저릿한 가슴 너머의 슬픔을 정밀하고 세세하게 공감해 주는 것이다. 애초에 불가능한 이런 것을 기대하는 인간은 언제나 고독하다. 날 때에도 혼자이지만 살아가며 아픈 순간순간 철저히 혼자임을 깨닫는다. 물론 삶의 끝은 말할 것도 없다. 아이가 고통으로 일그러질 때(하다못해 감기로 인한 고열일지라도) 그 아픔을 어떻게 해도 대신할 수 없는 무력감은 인간 모두가 혼자임을 알게 했다. 아무리 목숨 바쳐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줄지어 있다 해도 말이다.
무엇이든 내어줄 수 있을 만큼 친구를 그리고 가족을 사랑한다. 달라는대로 내어주는 것이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돕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어떤 아픔이든 곁에 있는 것 외에는 할 수 없음을 받아들인다.(그조차도 원하지 않을 때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이로 얻은 것은 스스로 괴로운 때에도 위로해 주거나 주지 않거나 일절 실망하거나 서운하지 않음이다. 바라지 않는 마음만으로도 그들에게 편안한 자리를 내어줄 수 있었다.
고독과 외로움은 동일선상에 있는 듯 하지만, 고독을 원망할 때 외로움이 찾아왔다. '가족이라면' '친구라면' '연인이라면' 사랑에 조건을 붙이자 외로움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아이를 생각하는 마음에 무엇이든 다 내어주는 것이 해가 되고, 대신 아파할 수 없는 일들을 겪으며 사랑을 재정의했다. 외로움은 필연적이었다. 썩어 문드러질 육신이 주어졌듯 인간 모두에게 고독이 주어진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덩그러니 혼자라는 오롯한 실체를 즐기기까지 한다. 그런 고로 외로움 역시 슬프거나 아쌀한 무엇이 되지 않는다. 삶이라는 잔칫상을 두고 배불리 먹는 중에 맛보는 여러 맛들 중 하나일 뿐이다.
필연적으로 내게 다가오는 고독을 이해할 때, 타인을 조금 더 수용할 틈이 생긴다. 왜 그렇게 박박대는지, 차가운지 때로는 서로 경멸하는지를 먹먹히 이해한다. 필시 고독과 외로움에 맞서 싸우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밀어내고 저항하며 고독의 맛을 즐기지 않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타인이 나를 오롯이 이해할 것이라는 기대, 내가 타인의 결핍을 끌어안을 수 있다는 오만. 집착을 내려놓자, 도리어 따땃한 위로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그저 누군가들의 존재만으로도 감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