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살 나는 무기력에 빠져있었다. 다시 미국에 가면 방법이 있을 것처럼 비행기에 몸을 실었지만, 답답하고 막막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길을 잃은 아이처럼 헤매다 한국으로 돌아온 어느 날이었다. 커피숍에서 친구와 의미 없는 대화를 이어 가던 즈음이다. 친구가 툭하고 이야기를 건넨다.
"민혜, 소개팅할래?"
"누군데?"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그래. 심심하니까.’하며 별 생각이 없었다. 소개팅을 가기로 한 그날, 인생의 극적인 2막이 기다릴 것을 꿈도 꾸지 못했다. 며칠 후, 친구가 연락처와 이름을 알려주었다. 010-5***-6*** 채 씨? 머뭇거림 없이 친구 앞에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소개받기로 한 하민혜인데요."
"아 예.. 안녕하세요."
"시간은 언제 괜찮으세요?"
"아 저는 아무 때나 괜찮아요."
"그럼 토요일 괜찮으시죠~ 그쪽이랑 중간이 여의도인데, 여의도에서 보실래요?"
"아 네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고 나는 불쑥 여의도로 약속 장소를 잡는 여자가 당황스러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부분에서 우리의 결혼 생활을 엿볼 수 있는데, 아내는 늘 척하고 결정을 내린다. 남편은 "아 그래."하고 본인의 생각을 숨기곤 한다. 때로 결정이 못마땅하면, 대놓고 그 뜻을 말하지 않는다. 그저 표정과 말투로 표를 내곤 한다. 옳고 그른 것이 아니다. 다만 가치관의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나는 "점심 뭐 드실래요?" "아무거나요." 이런 식의 대화가 어렵다. "점심 뭐 드실래요?" "짜장면 어떠세요?" 이렇게 속내를 드러내는 편이 배려라고 받아들인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는 것을 사려 깊고 배려심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역시 나는 의사를 말하는 편이 가볍다. 시작부터 서로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게 우리는 내가 정한 여의도에서 처음 만났다.
인연을 '때'라고도 한다. 그러니까 인연은 어쩌면 고작 '타이밍'이란 소리이다.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그와 처음 만난 날은 치맛바람 살랑이고 벚꽃이 휘날리는 봄날이었다. 옛말에 여자를 잡으려면 봄에 꼬시라고 했다. (참고로 남자는 가을에 넘어가기 쉽다는 이야기가 있다.) 연인으로 시작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계절은 없을 터였다.
처음 만난 날 여의도의 벚꽃길을 걸으며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말이 조금 많다고 생각했다. 나는 무언가가 시작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눈치챌지 모르지만 대개 호감이 가는 상대를 만나면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떠드는 법이다. 자신과 엄마 사이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눈빛에서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내가 그의 마음을 빼앗았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다. 예의 바르게 헤어져 돌아온 다음 날, 그는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우리 동네를 찾아왔다.
나는 무기력에 빠진 백수였기에 거의 매일 데이트를 했다. 실은 그래 봐야 채 여름이 오기도 전이었다. 좋아하는 밥집을 찾아가 주문을 하고 기다리던 참이다. 잠시 화장실을 갔는데 갑자기 연달아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불현듯 그와 보낸 뜨거운 밤이 머릿속에 스쳤다. 거울 속 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다가 하얗게 질렸다. 만난 지 고작 3개월즘 채워가는 시점이었다. '큰일이다. 아니겠지?', '엄마에게 어떻게 말하지', '왜 이렇게 등신 같을까' 온갖 생각으로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태연한 얼굴을 하고 제 자리로 돌아갔다.
식사를 하는 동안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속으로는 온통 나의 무기력과 무책임함을 질타하고 있었다. 그날, 아무도 모르게 약국에 들러 테스트기를 샀다. 해보나 마나라는 느낌이 들었지만 체한 것이길 바라면서, 또는 무기력에 대한 스트레스로 예정일이 늦어진 것이길 바랐다. 누가 흔들기라도 하듯 테스트기를 손에 꼭 쥐고 끝없이 뒤적였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하얗게 밤을 새웠다. 테스트기는 명확하게 두 줄이었다. 그렇게 나는 지금의 딸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으로선 있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나는 난감해하고 있었다.
무책임하지만 결혼을 생각할 만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고작 함께 봄을 보낸 것이 다였다. 착하고 성실해 보였으나 그는 나와 많이 달랐다. 아마 이대로 만남을 지속했다간 1년을 못가 헤어졌을게 분명했다. 며칠 지난 어느 날, 결심한 듯 그에게 고백했다.
"나 임신했어."
"응?"
일순간 아픈 침묵이 일었다. 버젓이 살아 있는 내 딸이 들으면 귀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이야기일 것이다. 가벼운 대화로 귀한 목숨이 왔다 갔다 했으니 말이다. 이렇게나 철없이 엄마가 된 데에는 그만한 책임이 따른다. 대가가 기다린다. 무기력한 당시에 어떤 지혜가 있지 않음은 당연했다. 급한 불을 끄고 보자는 식의 대화가 이어졌다. 그는 이야기했다.
"결혼해야지."
"왜?"
"임신했으니까 낳아야지."
"그럼 오빠는 여자 친구가 임신하면 다 결혼하겠네?"
"아니. 민혜니까 임신한 거지. 다른 사람은 임신을 안 하지."
‘민혜니까.’ 나를 식장으로 끌고 간 결정적인 한마디였다. 진심이었을까? 진심의 무게란 때로, ‘그때’라는 시간을 포함하고 있다. 물론 ‘그때’에는 진심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가 자신에게, 스스로의 인생에 무책임한 것은 나와 매한가지라고 생각한다. 그 당시 풍동에서 큰 한식당을 운영(경영)하고 있는 여자가 돈도 있어 보였던 것 같다.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입에서 “네가 사업도 많이 해봤으니 이런 건 잘할 줄 알았지!”라는 핀잔을 들었기 때문이다. 남편의 사업 세금 문제가 생겼을 때 첫째를 임신한 내 탓을 한 것이다. 피차 나도 도망친 것이고 그도 그랬던 것이다. 도긴개긴이다.
얼토당토않게 결혼식을 올렸다. 그 해 봄을 시작으로 초여름 식을 올리다니. 내가 나 스스로에게 얼마나 질려 있었는지, 삶에서 도망을 치고 싶었던 것을 여지없이 알 수 있는 사건이다. 흔한 프러포즈도, 신혼여행도 없었다. 이즈음 되면 어디 팔려갔나 싶을 정도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나를 값어치 없게 팔아치운 것 같은 생각도 든다. 얼마간 만나지도 않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아이를 임신했다. 철이 없었고 대책이 없었다. 삶의 방향을 잃어버렸고 내던지듯 살고 있었던 것이 사실인 것 같다. 생각할수록 가관이다.
21살 여름, 꽃집 아가씨 같은 얼굴로 등을 훤히 드러내고 걸어 다닌 적이 있다. 젖살이 붙은 순진한 얼굴로 어른인 척하고 싶어 하는 모양으로 보였을 것이다. 어딜 봐도 시골 아가씨 같은 얼굴로 가슴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옷을 입기도 했다. 브래지어를 왜 입어야 하느냐며, 타국의 문화를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다음 해 여름 내가 입었던 옷들을 꺼내 정리하다가 혀를 내둘렀다. '이걸 입었다고?'
그래서인지 모른다. 나는 어쩌다 되지도 않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너그러이 이해하곤 한다. 그도 그가 그런 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여러 차례, 지난 나의 행동을 적잖이 이해할 수 없었다. 실은 다들 그럴 것이라고 추측한다. 과거를 낱낱이 설명할 수 있다면 스스로 합리화를 잘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옷을 벗고 다닌 딱 한 번의 여름이 있었고, 임신을 하고 결혼을 결심한 일이 딱 한 번 있었다. 왜 그랬는지 솔직한 말로 다 설명할 수가 없다. 옷을 벗고 다녔던 만큼의 수치심으로 그만인 일이 아니었다. 결혼은, 그리고 출산은 내 인생의 2막을 열었다. 순진한 얼굴로 등을 드러내고 다니는 것과 차원이 다른 일이다. 실은 그렇다고 해서, 신중하게 결정했다고 해서 뭐가 달라졌을지는 잘 모르겠다. 때로 어떤 결정에 앞선 우리의 예측은 그 자체로 오만한 것일지 모른다.
기가 막힌 인생의 2막을 결정하는데 우연히 커피숍에 들어가듯 결혼을 시작했던 것이다. 인생에서 놓치면 안 되는 순간들이 있는지 모른다. 그마만큼 충격적이고, 다채로운 2막이 시작되는 선택이 그런 것 들이다. 어쩌면 나는 대체로 나의 선택을 믿지 못하는 것 같다. 스스로 움직였지만 과연 내가 결정한 것인지, 삶이 결정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일지 무슨 일이든 주저함이 없는지 모른다. 내가 선택하면 더 나을 것이라는 확신이 애초에 없어서일까? 사람들은 결정이 빠르다고, 행동이 빠르다고, 마치 주관이라도 있는 양 이야기를 하지만 과분하다. 어쩌면 아무 생각이 없는지 모른다. 그저 매 순간, 닥치는 대로 최선을 다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