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한 것은 다만.

듣고 있어요 아저씨

by 하민혜

막 퇴근하려던 참이었다. 물기를 머금은 숨이 텁텁한 여름밤이다. 안경이 슬쩍 빗겨 앉은 줄 모르고, 걸음에 집중하기 바쁜 아저씨였다. 몸을 비스듬히 의자에 걸친 채 맥켈란 18년을 주문한다. 취할 대로 취한 손님을 보고 그대로 가버리기엔 불편했다. 손님인 양 멀찍이 거리를 두고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아니나 다를까. 매니저에게 휴지며 과자 따위를 던지기 시작하더니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곤란해하는 직원들을 바라보며 언제 즘 나서야 할까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그날 나는 늘어진 흰 티에 짧은 청반바지 차림이었다. 무섭기보단 부끄러움이 컸다. 직원들에게 귀엣말로 조언하며 여전히 끄트머리에 앉아 있었다. 남자 매니저는 정중하게 그 손님을 밖으로 내보내려 했다. 이제 아저씨는 계산을 하지 않겠다며 성을 내기 시작했다. 결국 경찰 신고까지 들어갔다. 더 이상 앉아있을 수 없었다.


"손님. 계산은 하고 가셔야죠."

"넌 뭐야??"

"전.. 사장인데요.."


위아래로 훑어본다. 머리는 감고 나왔어야 했다.

"이러시면 안 되죠~드신 게 있으니 결제는 하고 가세요."


질긴 실랑이 끝에 드디어 경찰들이 나타났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 뒷짐 지고 서서 계산하라고 타이르는 게 경찰의 역할이었다. 만취한 아저씨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만원 때문에 무단 취식이 아니라는 설명을 해준다. 속닥이듯 내게 잘 좀 해보라고 한다. 그렇게 그저 서성대던 경찰들은 아저씨를 우리에게 맡기고 자리를 떠났다.

"손님. 잠깐 앉으셔서 저랑 얘기 좀 해요."


자극하지 않는 어린 사장이 그렇다고 순순히 보내줄 생각도 없어 보여 백기를 들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그렇게 긴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았다. 아저씨는 바스락 대는 주머니 속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다. 안경이나 좀 추켜세웠으면, 입이 근질거렸다. 소동을 피우는 동안 가게에 있던 다른 손님들은 자리를 뜨고, 들어오던 손님은 도망을 갔다. 그런 손해에 관심 없는 내가 신기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말이야.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니야. 너 천안함 사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아저씨는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엉뚱한 속을 꺼내 보였다.

무엇이 그렇게 억울한지, 세상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원망이 가득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히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내게 중요한 것은 옳고 그름이 아니었다. 아저씨는 어딘가 아프고, 그 괴로움을 내보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에 나는 세상에 미숙한 스물셋이었다. 신촌에서 술집을 운영하며 문신으로 뒤덮인 사장님의 협박을 받은 적도 있다. 어떤 일이 벌어지건 나대는 심장만큼 큰 일은 아니었다. 가볍게 넘길만한 괄시는 더욱 많았다. 건물주만 하더라도 나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남자 매니저와 대화를 나누려 하셨는데, 매니저는 '여기, 사장님과 얘기하세요.' 하며 난처함에 발을 동동 구르곤 했다. 온 마음 여기저기에 생채기가 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일까? 억울하고 고된 삶의 아픔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묵묵히 듣고 있는 나를 보는 눈빛이 느닷없이 바뀌는 순간이 있었다. 어색하게 그 눈빛을 의식하는 찰나, 아저씨는 바스락대던 주머니로 손을 옮겼다. 다시 담배를 꺼내는가 싶더니, 기다란 테이블 위에 가만히 신용카드를 올려놓는다. 마음이 바뀔까 싶어 얼른 계산을 하고 돌려 드렸다. 망령처럼 눈을 내린 채 허둥지둥 나가시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이제 돈은 잘 내고 다니시려나.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심판하지 않고 이야기를 들어줄 순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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