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목욕탕엘 갔다. 뜨거운 숨이 간절한 계절이다. 처음가 본 목욕탕도 아닌데 어제 따라 풍경이 새삼스러웠다. 다리를 쩍 벌리고 앉은 여자, 뱃살이 흘러넘치고 엉덩이 위로 덩어리가 붙은 여자, 다른 사람의 몸을 탐욕스럽게 바라보는 여자, 탕에서 멍 때리는 여자가 보인다. 게 중 내 모습도 있을 테지.
때는 벗겨내도 또다시 자리 앉는다. 밀어도 밀어내도, 다시 새것처럼. 그럼에도 왜 때문에 벗겨내야 할까. 운동도 마찬가지다. 어쩌다 한번 강도 높게 운동한다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꾸준히, 어쩌면 평생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언젠가는 끝날 생인데 몸은 병들고, 늙어 죽는 게 분명한데. 늦추고, 낮추는 효과가 있던들 사고 한 번이면 목숨이 끊어질 터다.
그럼에도 운동하는 이유는 사는 동안 질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때를 벗기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이따금 허무주의에 빠진 대도 우리는 알고 있다. 삶은 결론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것을. 처음 운동은 고단하기만 하다. 안 하다 하면 더하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러나 싶다. 어느 만큼 습관이 붙기 전까진 꾸준히 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다. 처음 1을 하던 몸이 2를 하고, 열을 해나가기까진 길고 지루한 과정이다.
어떻든 죽음이라는 결론을 향해 간대도, 삶은 오늘이 전부다. 내일이 있을 것 같지만 언제나 오늘밖에 없다. 오늘을 잘 살기 위해 운동하고 떼를 벗기는 거다. 삶을 겪는 건 나고, 이 몸이다. 몸이 무너지면 마음도 사그라든다. 단단한 몸에 마음을 세우기가 수월하다는 말도 될 터다.
요가를 좋아한다. 몸의 세세한 근육들을 느끼고 매만지는 기분이라설까. 때밀이 타월을 만날 때도 넓은 면적보다 구석구석 모서리를 공략할 때 희열감을 느낀다. 손이 닿지 않는 곳, 평소라면 쳐다도 보지 않을 후미진 곳을 사정없이 건드린다.
같은 연유로 마사지를 좋아하는 것 같다. 받은 지 오래지만 받을 적마다 탄성을 지른다. 까무룩 모르쇠 하고 있는 부분을 누르면 아찔한 고통과 동시로 행복감이 든다. 인간 부류 중에 자기 자신을 일부러 고통 속에 넣고 행복을 느끼는 변태가 있다던데, 그 변태가 나인 줄도 모른다. 고통은 고추냉이다. 빠지면 심심하고 적당히 섞어주면 자극과 동시에 삶의 맛을 끌어올린다. 운동이 그렇다. 나로 말하자면 근육이 늘고 체력이 느는 데까지 오래 걸리는 몸이지만 확실히 이전과는 다름을 안다. 아침 눈 뜨는 게 가볍고 밤이면 몸이 녹아 사라진다.
내 살은 보드랍다 못해 물렁하다. 유전도 있을 테고 먹는 일에 취미가 없어 마른 편이다. 살집이 없는 중에 살에 힘이 없달까. 연약한 엄마는 너 같은 물렁살은 힘쓰는 일 못해,라고 곧잘 말씀하셨다. 내 살은 엄마를 꼭 닮았다. 밤낮 장사한다고 문을 열고 닫다 횡단보도에서 쓰러진 적이 있다. 아이 둘을 연달아 낳고 새벽마다 젖을 물리다 어지럼증이 찾아오기도 했다. 역시 물렁살의 체력이란 저질이라며 핑계 대기 좋았다.
3년 전 요가를 시작하기 이전 운동이라곤 딱히 해본 일이 없다. 다이어트가 필요한 몸이 아닌 데다 쳐지는 일없는 20대를 끝으로 출산하고 또 출산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몸이 여태껏 그 많은 일을 해왔다는 건 아무리 봐도 저질 체력이 아니란 증거란 말이다. 엄마 말이라고 다 맞진 않는가 보다.
매번이고 벗겨내는 떼처럼, 매일이고 조금이라도 운동하기를 거르지 않는다. 그건 삶이란 과정에 있음을 스스로 되새기는 작업이다. 더욱이 고통을 즐기는 법을 배우는 중이랄까. 다만 하염없이 떼를 벗기는 여인네들의 무심한 표정에 연민이 일었다. 요가할 때 이따금 고통으로 일그러지기도 하는데. 어떤 선택이든 고통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 노상 떼를 밀어야만 하는 것이. 그런 삶의 고단함이 안타깝고 애틋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