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들은 어떤가 싶게 나는 욕심이 참 많은 사람이다.
돈 잘 벌어야 해, 외모도 봐줄 만해야 해, 성격 착해야 해, 부지런해야 해, 자기계발 열심히 해야 해, 기타 등등. 타인에 대한 기준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기준이다.
뭐라도 흠결이 나면 우주 끝자락에서 소멸될 만큼 스스로 작아지곤 한다.
예를 들어 돈을 잘 벌지 못하는 상황이거나, 외모가 형편없는 느낌이 들거나, 못된 말이나 인격이 부족한 행동을 하거나 게으른 듯 늘어지고 있자면 가차 없이 세상 가장 형편없는 사람 취급을 했다는 뜻이다. 가슴 한켠에 나를 못마땅해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럼 그렇지.'
'네가 그렇지.'
되는 일이 없는 듯한 느낌이 들 때면, 무엇이 그리고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내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어떤 능력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에 집중했다. 청결에 강박을 가진 이들과 같은 완벽주의는 나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야말로 완벽한 착각이었다. 어설픈 점을 포함해 내가 원하는 자신에 대한 이미지에 대해 철저히 노력하고 연기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백조가 우아하게 물 위를 떠다니기 위해 물속에서 방정맞게 발을 휘젓는 모양과 비슷했다. 가만히 내 안을 들여다보면 불안하고 초조했으나, 겉으로 보기엔 세상 여유롭고 느긋한 척을 했다. 실은 그런 나에게 나조차 깜빡 속았을 정도이다.
조금씩 세상 경험이 늘고 나이가 들면서 이 세상 전부일 것 같은 친구와 연인과의 관계에서 한 발짝 떨어질 수 있었다. 자녀를 키운다는 핑계로 다른 일들에는 크게 목메지 않는다. 물론 그 집착이 자녀에게 넘어간 점도 없지 않은 듯하다. 상황이 이렇게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으로 나를 담그니 자연스레 마음공부에 전념하게 되었다. 이제 무슨 일이든 크게 노여워하지 않는다. 찬란했던 그때처럼 친구와의 일이나 엄마와의 사연으로 몇 날 며칠을 속 끓이는 일도 줄어 들었다. 어쩌면 삶이 조금 밋밋한 맛이 되었달까? 이게 행복인 줄 모르고 또 삶을 지하 감옥으로 끌어 내려간 일도 있긴 했지만 다행히 지혜롭게 빠져나왔다.
마음에 관심을 갖은 후 어느 날부터 명상을 시작했다. 궁둥이 덴 망아지처럼 미쳐 날뛰던 20대를 생각하면 그런 내가 명상이라니, 조금도 와닿지 않는다. 삶은 이렇게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명상을 하고 있으면 오만 생각이 떠오른다. 과거의 어느 시점부터 당장의 사람들, 상황, 상상까지 케케묵은 온갖 견해와 관점들이 떠오른다. 이것이 내가 맞나 싶을 정도로 해괴망측한 생각이 떠오르는 때도 있다. 명상을 2년을 넘게 즐기고 있으니 그에 따른 나름의 방편을 이야기해 보려 한다. 우선 명상은 다들 알고 있듯 생각을 멈추는 것이 아니다. 당장에 생각을 멈춰야지 하고 시도해보면 이내 알아차릴 수 있다. 1초도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을.
'생각을 멈춰야지' 하고 '생각'하는 것조차 멈출 수 있겠는가? 당장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얼른 코끼리가 떠오르는 것과 같다. 구체적으로 말해 위장에 대고 소화를 그만 멈추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이 불가능한 일이다.
명상은 떠오르는 모든 생각과 느낌을 바라보는 일이다. 숨에 집중하는 나를, 생각이 떠오르는 나를, 그 생각에 딸려가서 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알아차리고 그것과 마주하는 일이다. 그저 알아차리는 것만으로 주의가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옴을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반드시 눈을 감고 가부좌를 틀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걸음을 걸을 때, 대화를 나눌 때, 음식을 먹을 때에도 명상 상태로 갈 수 있다. 머리를 비우고 멈춘다는 표현이 영 틀린 건 아니지만, 조금 더 명확한 표현은 현재에 머무는 일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산 중 자연의 소리로 가득 찬 아름답고 정적인 공간에서만 가능한 일이 아니란 뜻이다. 도리어 시끌벅적하고 요란스러운 상황에서의 명상이야말로, '현존'의 진면모를 느낄 수 있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의 깨어남을 경험한다면 드디어 왜 명상을 해야 하는지 명확해진다.
명상하면 어떻다더라. 알게 뭐람. 매일 지극히 열정을 다해 쫓기는 사람이 명상을? 또는 괴로워 죽겠는 사람이 명상을.. 시작은 카더라 통신을 통한다 해도, 무언가를 지속하는 힘은 그것을 '왜' 하는지가 명확해야만 한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유튜브에 흔한 명상을 틀어놓는 일로 시작하는 것은 좋으나 과연 변화를 눈치챌 수 있는 때까지 지속할 수 있길 바란다. 졸고 앉아있는 게 아니라 현재에 머무는 것으로, 웃거나 울거나 화내거나 짜증 내는 모든 순간으로 가져가기를 추천한다.
말과 글은 쉼 없이 쏟아지지만 언제나 한계에 부딪힌다. 개인적인 실력이 문제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명상이니 현존이니 하는 것을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워서이다. 현실감이 없달까, 외국인을 앞에 두고 손짓 발짓 섞어가며 한국말로 설명하는 답답함이랄까.
명상이 왜 좋은가, 얼마나 좋은가를 마음껏 말해 못하는 구차한 변명이다. 입이 열리는 순간, 키보드에서 손이 움직이는 순간부터 의도와는 조금 다르게 구색되는 것을 지켜보는 게 영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부족한 그대로 마음을 다할 뿐이다.
나는 수시로 현재에 머무르려는 연습(명상)을 통해 머릿속 생각과 몸의 느낌, 감정을 바라보는 연습을 한다. 어린아이들과도 잠을 청하는 자리에서 늘 함께 명상을 하고, 현재에 머무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저 나의 생각, 느낌, 감정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일말의 각성이 오고 그런 순간이 잦을수록 평안과 안도함에 젖는다. 마음에도 관성이 있어, 한 번 그리고 두 번 세 번 알아차림을 늘려갈수록 속도가 붙고 '왜' 이것을 하는지 스스로 명확해질 수 있다. 내가 누구인지 잊을만큼 숨이 턱 막히는 장관을 마주하는 때, 쉼없는 생각이 조용해지며 오직 지금에 몰입하는 때 그것이 명상이고 현존이다. 생각과 느낌에 끌려가듯 살아가지 않고 스스로 깨어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