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친구들이 놀러 왔습니다.
여러 차례 놀러왔던 아이들이라 낯설거나 어렵지 않았습니다.
상대적으로 의젓한 첫째와 전형적인 의존형 둘째가 함께였습니다.
이 집 아이들의 아빠는 특이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있다면 저런 사람이겠구나 싶게 가족에게 헌신적입니다.
심지어 외모가 부족하거나, 경제적인 물의를 일으키거나, 술을 마시는 등의 문제가 있지 않습니다.
피해 의식은 있을법한데, 그마저도 심하게 있진 않습니다.
아마 피해 의식이 있는 남자인 경우 아내에게 그렇게까지 다정할 수는 없을 것 같기 때문이죠.
오직 아이들과 아내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처럼 돈 버는 일, 집안일,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밤새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 아이들을 등교, 등원시킵니다. 집에 있는 아내를 신줏단지 모시듯하고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나 막내 딸아이를 보석 다루듯 대하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혹시나, 밖에서만 저러는 척하는 건 아닐까 싶었지만 실망스럽게도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다들 그렇듯 남의 집 이야기는 남의 집 이야기일 뿐이죠. 비교하는 마음을 완전히 떨치긴 어렵지만 대체로 어떤 남편을 보아도 '그래, 그래도 내 남편이 낫다.'라는 게 저의 의견입니다. 물론 이혼을 하려 했던 것도 맞지만 그건 남편이 문제 덩어리라 생각했기보단 서로의 가치관 차이로 이 결혼이 실패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일하게 내 남편이 낫다고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완벽해 보이는 사람입니다. 그 집의 아이들이 오늘 놀러 온 것입니다.
같은 아파트 내 심지어 같은 동, 옆라인에 사는 집이니 종종 마주치고 왕래합니다. 무한한 아빠의 사랑을 받고 있는 딸아이는 이제 8살이 되었습니다. 늘 관심을 받고 자란 티를 내는 그 아이는, 잘 놀다가도 수도 없이 나를 건드립니다. 문 닫고 책을 읽고 있어도 부엌에서 달그락 거리고 있어도 쫓아다니며 무언갈 묻고, 내 관심을 사려고 애를 쓰죠. 그 아이의 행동이 조금 불편하고 약간 언짢은 느낌을 느낀 적이 오늘이 처음은 아닙니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그냥 귀찮게 하기 때문에 언짢은 것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습니다. 이전의 나라면 내 느낌에 별 관심이 없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것입니다. 대놓고 짜증을 낼만큼도 아니었고 꽤나 상냥한 옆집 이모 역할을 무난히 해낼 수 있었기 때문에 이 불편한 느낌을 눈치채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컨디션 탓을 하거나, 책을 읽는 것을 방해했기 때문이라고 자위했을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 수상쩍은 느낌을 따라 가만히 느끼려 노력했다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아빠의 사랑을 받고 싶었던 어린 나의 마음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옆집 아빠는 그 아이를 보물 다르듯 어루만지고 따뜻하고 자상한 목소리로 어르곤 했습니다. 그런 아빠는 처음이었습니다. 어쩌면 이상 속에 있는 아빠였달까요. 내가 받고 싶었던 배려, 나지막이 타이르는 목소리, 달콤한 사탕이 녹아내릴 듯 애정이 듬뿍 담긴 눈빛이 그랬습니다.
그 불편한 느낌이 일종의 질투임을 순식간에 느꼈습니다. 존재만으로도 사랑받는 아이. 나도 당신도 그리고 누구도 그래야 하는데, 저 아이는 무슨 특혜를 타고난 걸까. 이따금 부모로부터 혹은 나라로부터 버려진 아이들, 가난하고 아픈 아이들을 영상에서 볼 때 느껴지는 분노와 같은 느낌도 올라옵니다. 억울하다. 불공평하다..
남편에게나 나의 아버지에게 억울한 느낌이 드는 게 아닙니다. 엉뚱하지만 이 세계를 창조한 누군가에게, 그게 하나님이든 신이든 알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원망이라면 어떨까요. 타고나길 누군가는 죄를 안고 태어나다니, 누군가는 왜 복을 갖고 태어나는 걸까요. 원죄니 업이니 하면서 합리화하고 싶은 인간의 욕구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래야만 납득이 될 테니까. 때로는 스스로 그 삶을 선택했다는 설도 꽤나 합리적인 가설입니다. 책임회피죠. 이 불공정함에 때로 화가 나고 슬프면서 신경질이 납니다. 인생에 레벨이 있다면 대한민국의 중산층 가정에서 나고 자라, 사지 육신이 멀쩡한 저는 보통 레벨즈음은 되는 걸까요? 쓰리고 아린 삶을 살아내는 이들에게는 지금 떠드는 이야기들이 가소롭기 짝이 없을지 모릅니다. 자기 주제를 알라며, 당신이 할 소리가 아니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사랑받는(받는 것처럼 보이는) 그 딸아이에게도 남모를 속사정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따졌을 때 무한한 사랑을 받는 것으로 보인다 해도 그 아이가 느끼는 결핍감이 저보다 클지 적을지 알 수 없는 것이죠. 불편하고 괜히 미운 느낌을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나자, 이내 따라 올라왔던 얼토당토않은 피해의식도 사그라들기 시작했습니다. 저 아이보다, 그리고 누구보다 난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스스로에 대한 연민이 올라옵니다. 어리석기 짝이 없고, 어지럽다 못해 수치스럽습니다. 이러저러해서, 어떻기 때문에, 온갖 해석을 붙이며 자신을 한없이 깎아내리고 있는 나를 가엾게 바라봅니다.
자신에 대한 연민은 결국 세상을 향하기 마련입니다.
가차 없이 나를 대하는 그 마음 역시 마찬가지죠.
'이러면 안 돼.' '그런 마음은 안돼.' '이렇게 살아야지.'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지.'
이런 질책은 어떤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압니다.
우리 모두 스스로에게 올라오는 어떤 감정에든, 마음에든 생각에든 좀 더 너그럽고 관대할 필요를 느낍니다.
도대체 얼마나 멋져야만, 아름다워야만, 성공해야만 '사랑받을 자격'이 생기는 걸까요?
얼마나 착하고 완벽하며 긍정적이고 밝아야지만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걸까요?
나티코의 글에서처럼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맺는 관계들 중 나와의 관계만이 평생 이어진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나에게 관용의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세상을 향해 온전한 사랑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