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겨울, 비스듬히 어스러진 천장을 올려보면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작은 다락방은 나의 열병과 함께였고, 이불속 벌어지는 짜릿한 전기 놀이, 베개 싸움을 마음껏 허용해 주었다. 바닥에 조구려 앉아 무심히 눈을 떨구면 작은 개미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조그마했던 나의 손가락보다도 작은 개미에게서 깊은 생명력을 느낄 수 있었다. 행여나 치열한 그들을 방해할까 싶어 굼쩍이며 자리를 비켜주곤 했다. 어쩌다 개미가 내 손에 올라탔을 적엔 코앞에 가져다 올려보기도 했다. 개미는 나를 위험한 존재로 볼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나 빠르게 타고 내려가진 않을 테니. 7살의 나는 동그란 눈의 강아지조차 무서웠고, 작은 개미 역시 조심스러웠다. 그 누구에게든 어떤 위협도 가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의 나를 말하자면, 고집 센 언니와 앙탈을 내는 동생에게 늘 모두를 양보하고 작은 방에 들어서 눈이 붓도록 울곤 했다. 얼굴을 쥐어뜯거나, 아무도 모르게 연필을 부러뜨린 적도 여러 번이다. 피해자 행세를 자처하고 아파했다. 작은 방은 나의 피난처이자, 안락함이었다. 때로 귀가 어둔 엄마가 말을 못 알아들을 때에도 웅크리고 앉을 공간을 내어주었다.
어느 날 밤은 끝이 뵈지 않는 따가운 열에 시달렸다. 하루 이틀 밤을 새도록 열이 끓어올랐고, 엄마는 옆에 앉아 수건을 적셔 이마에 얹어주셨다. 엄마가 방문을 열고 나가실 때엔 왠지 모르게 가슴이 조여 목소리가 헤어 나오지 못했다. 비스듬한 천장으로 눈을 돌렸다. 이내 천장이 흐물거리며 볼에 차간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어찌나 얼굴이 뜨거웠는지, 눈물은 흐를 새 없이 말라버렸다. 누구에게든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경험은 좋은 것이다. 묵직한 몸 위를 기는 개미와 인간의 존재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느꼈다. 일어나고 싶은 마음을 낸다 해서 일어날 수 없음을, 속절없이 발에 밟히는 개미처럼 이따금 나는 스스로 살아낼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여느 날처럼 활력을 되찾은 후에도 여전히 얼굴을 쥐어뜯거나(엄마에게 걸려 혼이 나기 전까지는) 연필을 부러뜨리긴 했지만 대체로 7살의 발랄한 모습이었다. 나는 언니와 동생, 셋이서 작은 다락방에 잠들곤 했는데 잠들기 전 할머니와 부모님 몰래 먹을 것을 후려오는 대작전을 펼치곤 했다. 주로 동생이 망을 보고, 언니가 수신호를 주면 내가 잽싸게 뛰어가 귤을 한 아름 가지고 방으로 돌아왔다. 몰래 먹는 귤은 언제고 맛보지 못할 만큼 달콤했다. 우리는 버둥거리며 번갈아 무서운 이야기를 꾸며내거나, 이불을 뒤집어쓴 채 유령 놀이를 했다. 나는 언니와 동생이 다투지 않을 때, 모두가 해맑게 웃고 있을 때마다 열광적으로 흥분했다. 웅크러진 얼굴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가족들 앞에 서면 몸을 사리지 않았다. 티브이에 나오는 우스꽝스러운 개그맨을 그대로 훔쳐 따라 하거나 춤을 추는 둥 모두가 배꼽이 빠지도록 만들곤 했다. 이따금 텐션이 높은 사람을 만나면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오른다. 그들과 내가 같은 영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의 숨은 어두운 면에 못내 마음이 쓰인다.
작은 방에 설킨 이야기는, 추억이든 회상이든 감평이 되어버렸지만 분명한 것은 내게 위안을 건넨 방의 기운이 마음에 또렷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공간은 우리에게 정신이나 영혼의 무엇이 아닐까 생각한다. 소중하고 은밀했던 어둡고 따뜻한 작은 방은 작은 나의 내면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