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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라코알라 Mar 31. 2022

일기를 쓴다는 것은

학습과 기억에 유용한 도구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 마르셀이 마들렌 향을 맡고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에서 '프루스트 효과'라는 심리학 용어가 탄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향기에 이끌려 기억이 빠르게 소환되는 경험, 저도 일상에서 흔하게 겪습니다. 20대 초반, 해외여행 자유화 바람에 편승해 저도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가게 되었죠. 부슬부슬 내리는 독일의 한산한 거리를 산책하면서 맡았던 산뜻한 꽃향기와 빗길의 냄새를 가끔 동네에서도 마주칠 때가 있습니다. 20년을 훌쩍 넘 시간이 지났음에도 독일의 풍경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오르고, 서늘한 기운이 살갗에 닿는 것 같이 느껴질 때면 참으로 신기합니다. 이렇게 특정한 냄새로 오래 전의 기억과 정서를 또렷하게 떠올리는 것은 뇌의 구조상으로 보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감정과 기억을 관장하는 편도체와 해마에 '후각 망울'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인지과정'을 감각기관으로부터 들어온 정보 중에서 주의를 기울인 정보를 부호화하여 저장하고, 유지하고 인출하는 포괄적인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의 포인트는 '주의를 기울인'입니다. 주의 집중한 감각 정보만이 부호화되어 단기기억에 저장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들어오는 수많은 감각 자극의 대부분은 시각(60%)과 청각(20%) 정보입니다. 시각으로 들어온 정보는 사진처럼 이미지로 부호화되고, 청각 정보는 소리의 패턴으로 부호화되어 단기기억으로 넘어가게 되죠.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설명하다가 갑자기 목소리를 크게 낸다거나 이상한 추임새 혹은 독특한 억양으로 웃음을 유발하는 것, 한곳에 서있지 않고 왔다 갔다 한다거나 PPT와 동영상을 활용하는 것 등은 모두 청각과 시각의 주의 집중을 위해 선생님들이 설치한 '의도된 장치'라 볼 수 있습니다. 부호화된 정보들은 암송(시연, rehearsal) 하지 않으면 30초 내외로 기억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다가 전화번호나 비밀번호 같은 것을 듣고 암기할 필요가 있을 때 필기구를 찾는 동안에도 입으로 그 번호를 중얼거리는 행동은 잊지 않기 위한 몸부림인 것이죠.


그렇다고 수업 시간에 중얼거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학생들에게 선생님의 장황한 설명을 듣기만 하지 말고, 간단하게 요약 필기하라고 권합니다. 교과서 귀퉁이도 좋고, 작은 노트나 포스트잇도 좋습니다. 듣고 보고 읽기만 하는 학습은 수동적인 학습에 해당되기 때문에 기억에도 효과적일 리 없습니다. 교과 특성에 따라 발표나 토론을 하게 하는 것 역시 단기기억을 오래 유지하기 위한 장치이며 동시에 능동적인 학습의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제 수업에서는 게임을 통해 학생들이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바꿀 수 있는 기억 전략을 경험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스토리'를 만들고, 이야기꾼이 되어보는 것입니다. 때론 억지스럽게 연결해서 한바탕 웃고 넘어갈 때도 있지만 학생들 사이에서는 반응이 아주 좋습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시간이 꽤 걸립니다. 왜냐하면 의미 없이 나열된 단어를 기억하기 위해서 아이들은 각자 자신의 경험을 꺼내 '스토리'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억은 경험과 학습의 중심이 되는 정신적인 과정입니다. '무엇'을 기억하기 위해 '어떻게'를 고민하는 방법 중에서 '스토리'는 굉장히 큰 힘을 갖고 있습니다.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던 단어에 자신의 감정과 경험, 즉 정서적인 배경을 끌어와 스토리를 만들게 되면 그때부터는 자신과 관련 있는 단어가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 경험한 것과 연결되면 기억의 단서가 생기게 되기 때문에 인출에도 매우 효과적입니다. 그래서 저는 학령이 낮은 자녀를 둔 부모님들께는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게 돕고, 폭넓은 경험에 노출시키는 것이 학습의 기초를 닦는 일이라고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것이 독서이고요.




마르셀 프루스트는 경험에 합당한 언어를 부여하지 않으면 그 경험은 사라지게 된다는 취지의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경험한 것, 느낀 것을 언어로 꺼내지(인출하지) 않으면 그 경험은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그래서 초등학교를 들어가면 그림일기를 숙제로 내고, 학령이 높아지면 일기를 쓰라고 권하는 것이죠. 일각에서는 선생님이 내 준 강요된 쓰기 숙제, 평가를 염두에 둔 일기 쓰기가 학생에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부정적인 의견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기를 쓰기 숙제, 글쓰기 훈련이 아니라 스토리를 만들어 기억에 오랫동안 남기기 위한 하나의 학습 전략을 터득하는 용도로 관점을 바꿔보면 어떨까요?


평가가 두려워 엄마가 불러주고, 고쳐 쓰게 하는 일기만 아니라면 자녀의 학습과 기억에 유용한 도구 중 하나가 '일기 쓰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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