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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라코알라 Mar 16. 2022

「테레즈 라캥」을 읽고

원래 이런 책이 아닌데....


라캥 부인은 아들을 기숙학교에 보내라는 권고를 받았을 때 두려움에 떨었다. 아들이 자기와 멀리 떨어지게 되면, 틀림없이 죽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녀는 아들이 공부를 계속하다가는 죽고 말 거라고 말했다. 결국 카미유는 더이상 교육을 받지 못했고, 그것이 그를 더 나약하게 만들었다.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카미유는 포목상에 서기로 들어가서 육십 프랑의 월급을 받았다.

포목상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는 어머니와 싸워야만 했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위험한 일을 겪지 않도록 언제나 애지중지하고 싶어했지만, 젊은 아들은 어른처럼 말하며 아이들이 장난감을 요구하듯이 일을 요구했다. 그것은 의무감이 아니라 본능에 의한 자연스러운 요청이었다. 어머니의 애정과 헌신은 그에게 가혹한 에고이즘을 심어주었다.

「테레즈 라캥」 중


동서고금을 떠나 자식이 잘못될까 노심초사하는 어미의 마음은 가히 박제 수준입니다. 질량에는 변화가 있을지 모르나 부피는 한결같네요. 아들이 10번도 넘게 죽을 고비를 넘겼기에 어미가 없으면 아들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보호'라는 명목 하에 아들을 묶어둔 것입니다. 꼼짝 못 하게 된 아들은 늘 그 상황을 갑갑하게 느꼈을 것이 분명합니다. 비록 자신이 그리 건강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지했더라도 말이죠.


「테레즈 라캥」은 에밀 졸라의 장편소설로 남녀의 불륜적인 사랑과 광기 어린 행동이 시대의 부도덕함과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고 당대 비평가와 언론으로부터 질타를 받았던 작품입니다. 그런데 저는 하필 위의 문장이 그냥 지나쳐지지 않았습니다.


자녀는 성장하면 부모의 품을 떠나 자신의 세계를 짓고, 거기에 머무르는 것이 본능인 것 같습니다. 라캥 부인의 아들, 카미유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아들을 향한 어미의 지나친 사랑은 먹지 않아도 되는 약을 계속 먹게 했고, 자식의 교육을 방해했으며, 그로 인해 또래에 비하면 형편없는 대우를 받으며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했습니다. 그마저도 어머니와 치열하게 싸워 이겨낸 승리의 결과였지만요. 카미유는 그런 자신의 처지를 측은하게 여기다 못해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되버렸으니 이 모든 원인은 어미의 잘못된 사랑 때문인 것 같습니다.


카미유의 부인, 테레즈는 라캥 부인의 조카인데 어려서부터 맡아 키우다 보니 자연스레 아들과 짝을 지어주고 함께 살게 됩니다. 무심한 듯 그러나 뜨겁고 거친 정열을 숨긴 테레즈에게 병적인 무기력함에 절어있는 에고이스트 카미유는 그리 매력적일 리 없습니다. 그때 카미유의 친구, 로랑의 등장은 테레즈의 잠자고 있던 본능과 감각을 자극하게 됩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애욕에 들끓수록 카미유는 둘 사이의 걸림돌이 되었기에, 급기야 로랑은 살인을 저지르 맙니다.


극적이면서도 퇴폐적인 드라마와 영화가 난무하는 시대에 이런 스토리가 진부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기질과 욕망, 그리고 본능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탁월해서 지루할 틈 없이 읽습니다. 더불어 자식에 대한 어미의 사랑은 어디까지가 적당한 수위인지 생각해 보게 되었고요. 아들을 향한 지극한 사랑의 끝에 남겨진 어미의 공허함과 슬픔, 두려움과 분노는 고령화에 들어선 이 시대의 모든 부모가 어쩌면 겪고 있을지도 모르는 자식 사랑에 대한 이면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소설을 읽으며 영화 <박쥐>를 자주 떠올렸는데 이유가 있었네요. 박찬욱 감독의 뮤즈가 된 에밀 졸라야 말로 세상을 명확하게 보 위해 램프를 밝혔던 행동하는 지식인 중 한 명은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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