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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라코알라 Jun 20. 2022

고3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이 건네는 위로


27킬로 부근에 고갯마루가 있고, 그것을 넘으면 마라톤 산이 얼핏 보이기 시작한다. 코스의 3분의 2를 달려온 셈이다. 스플릿 타임을 머릿속에서 계산해보니 이대로 가면 3시간 30분 정도의 기록으로 완주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 되지는 않는다.


2학년의 끄트머리, 작년 12월쯤이 33개월의 수험 기간 중 3분의 2 지점이었구나. 수능을 완주의 목표로 삼았지만 마음처럼 성적이 따라주지 않아 많이 불안해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35킬로 지점을 통과한다. 여기서부터는 나에게 있어 '미지의 땅'이다. 나는 태어나서 이제까지 35킬로 이상의 거리를 달린 적이 한 번도 없는 것이다.


무더워지기 시작하는 6월, 누구에게나 익숙하지 않은 것은 모두 처음과 같지. 3학년의 마지막 여름도 너희에게 그렇겠구나. 그래도 여기까지 달려온 너희들을 격하게 안아주고 싶다.


37킬로 부근에서 모든 것이 싫증 나버린다. 아, 이제 지겹다. 더 이상 달리고 싶지 않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체내의 에너지가 완전히 바닥난 것 같았다. 텅 빈 가솔린 탱크를 안고 계속 달리는 자동차가 된 기분이다. 물을 마시고 싶다. 하지만 여기서 달리기를 멈추고 물을 마시게 되면 그대로 더 이상 달릴 수 없게 되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목이 마르다. 그러나 물을 마시는 데 필요한 에너지조차 남아 있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니 슬슬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한다.


방학이지만 멈추면 안 된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오르고, 쉼이 필요한 지치고 고단한 마음 끝에서 재수를 생각하는  마음... 충분히 이해해. 그렇지만 멈추면 안 된다는 생각은 아직 멈추지 않고 걷거나 달리고 있기 때문일 거야. 너에게 그 어떤 말이 힘이 될 수 있을까?


40킬로를 넘어선다. "이제 2킬로 남았어요. 힘내세요!" 하고 차에서 편집자가 밝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온다. '말로 하는 건 쉽지'라고 대꾸하고 싶지만 생각뿐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벌거벗은 태양이 너무나 강렬하다.


수능까지 2개월 남짓의 시간이 남았구나. 수시 접수 기간이라 그렇지 않아도 뒤숭숭한 분위기에, 힘내라는 말이 너희들에게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다. 가장 불안하고,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낼 너희들에게 그 어떤 말이 거추장스러운 부담이 되어 짓누를까봐 하고 싶은 말들을 삼키고 눈빛으로 조용히 응원을 보낸다.


한 자가 넘는 여름 풀 너머로 결승점이 조그맣게 보이기 시작한다. 마라톤 마을 입구에 있는 마라톤 기념비이다. 그것이 진짜 결승점인지 아닌지 처음에는 잘 판단할 수 없었다. 물론 종착점이 보이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그 갑작스러움에 대해 까닭 없이 화가 치밀어 오른다.


11월이 쓰여있는 달력은 특별한 것 없이 깨끗하구나. 하지만 네가 찍고 싶은 결승점, 그것을 향해 달려온 지난 33개월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여러가지 복잡한 감정에 휩싸이겠지만 끝까지 너를 지켜내며, 마지막 결승점을 무사히 통과하길 바라고 또 바란다.


드디어 결승점에 다다랐다. 성취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 내 머릿속에는 '이제 더 이상 달리지 않아도 좋다'라는 안도감뿐이다.


오늘 하루, 단 한 번의 시험으로 그간의 노력들을 증명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일 테지.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안도감 그리고 이상한 허탈감 같은 것들이 밀려올 거라 짐작해본다. 고생했다. 오늘은 그냥 좀 쉬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사정을 들은 주유소의 아저씨가 화분의 꽃을 꺾어서 작은 꽃다발을 만들어 나에게 건네준다. "수고했어요. 축하합니다!" 이국 사람들의 그런 작은 마음 씀씀이에 가슴이 뭉클하다.


"그동안 진짜 고생 많았어." 하는 말 한 마디에 코끝이 시큰해지고, 그동안 마웠다는 말을 차마 입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네 마음을 잘 알고 있다. 혼자 달리는 길이 외롭고, 때론 두렵게 느껴졌을 때도 우리는 늘 네 옆에 있었단다.


아테네에서 마라톤까지의 소요 시간은 3시간 51분. 좋은 기록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아무튼 나는 혼자서 마라톤 코스를 주파한 것이다. 교통지옥과 상상을 초월하는 더위와 격렬한 갈증을 극복하고, 이만하면 나 스스로도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좋을 듯하다. 그러나 그런 일은 지금 이 순간 아무래도 좋다. 아무튼 더 이상 한 발짝도 달릴 필요가 없다. 뭐라고 해도 그것이 가장 기쁘다. 아아, 이제 더 이상 달리지 않아도 괜찮다.


바라고 원하는 목표 점수를 갖지 못했더라도... 넌 충분히 훌륭했다고 말하고 싶구나. 이 모든 것들이 처음인데도 잘해주었고, 멈추고 싶었던 순간마저도 남 에너지를 그러모아 여기까지 와준 것이 그저 고맙고 기특할 뿐이다. 너도 그런 자신에게 수고했다고 말해줄 수 있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그런 너를 더욱 사랑해 주어라.


너희들의 지난 33개월은 앞으로의 인생에서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일 테지.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의미는 남다르고, 때론 퇴색되고, 혹은 더 강렬해질 거야. 앞으로 힘든 시기가 또 찾아오더라도 너 자신을 믿고, 멈추지 않는다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너의 종착점에 반드시 서 있을 거라 믿는다. 수고했다... 그리고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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