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목요일은 큰아이의 기말고사가 시작된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운전사를 자처하며 딸아이 등굣길에 동행했지만, 학교에 도착해서는 평소와 다르게 주차를 하고 차 안에서 30분 정도 대기하며 학부모 감독관 유의사항을 읽어봅니다.
학교마다 차이가 있지만 딸아이가 다녔던(그리고 다니고 있는) 중학교에서는 특별히 학부모 감독관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험 감독을 설 일이 없었지요. 그런데 고등학교에 들어오니 1년에 네 번 치르는 정기 고사에 학부모 감독관을 요청하시더라고요. 3월에 있었던 학부모 총회 때 신청자 명단을 돌렸고, 큰아이의 첫 고등학교 생활이 무척 궁금했던 저는 덜컥 이름 석 자를 써서 제출했습니다. 물론 명단을 완성하지 못하면 귀가할 수 없다는 담임 선생님의 귀여운 협박도 있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저는 꼭 한 번 시험 감독을 서보고 싶었습니다.
평소에는 그렇게까지 막히지 않던 도로가 폭우 때문인지 그날따라 꽉 막혀서 거북이 주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10여 분 동안 고작 200m를 갔을까요? 안 되겠다 싶어서 우회로로 빠져 다행히 저희는 늦지 않게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지각한 학생과 선생님들이 속출하는 요상스런 날이었습니다. 시험이 시작되는 9시 정각에도 끝내 교실에 도착하지 못한 몇몇 친구들은 결시 처리가 되고 말았지요. 사회는 참으로 냉정하죠?
딸아이의 학교는 학급의 학생들을 반씩 나누어 다른 학년과 섞여 시험을 보게 합니다. 부정행위를 방지하기 위한 비책이라네요. 복도에 나란히 정렬되어 있는 책가방도, 책상 위에 필기구(컴퓨터 사인펜, 연필, 지우개, 화이트)를 제외한 그 어떤 것도 허용되지 않는 것 또한 부정행위 방지를 위해 지켜야 하는 규칙이라고 했습니다.
'학부모 감독관'이라고 쓰인 명찰을 가슴에 달고, 시험 시작 10분 전에 지정된 교실로 향했습니다. 자녀의 반에 감독관으로 들어갈 수 없는 규정 때문에 학교 측에서 임의로 반을 정해 주었고, 입실 30분 전에 반이 공개될 만큼 철두철미했습니다. 핸드폰의 전원도 꺼서 선생님께 반납하고, 가방마저 학부모 대기실에 놓고 몸만 나서자니 그때부터 가슴이 콩닥거렸습니다. 마치 제가 시험을 보러 가는 것처럼 떨리더군요. 해당 교실의 뒷문으로 들어가 시험 감독 선생님과 눈인사를 나눈 후, 학생들의 모습을 둘러봅니다. 모두 똑같은 교복을 입고 앉아 있는 학생들의 뒷모습에서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딸아이는 지금 어느 교실에 앉아있을지 모르지만, 시험을 치르게 될 학생들 하나하나가 제 자식처럼 느껴져서 저도 모르게 열심히 응원을 보내고 있더라고요.
시험 시작 5분 전, 감독 선생님의 손이 무척 바쁘십니다. 그도 그럴 것이 가로줄로 1학년과 3학년이 교차로 앉아있기 때문에 시험지를 학년별로 나누어 배부해야 하기도 하고, 시험지가 적게는 2장에서 많게는 5장인 과목도 있기 때문이죠. 실수 없이 정확한 시간에 시험이 시작되기 위해서 선생님들도 최선을 다하고 계셨습니다. 고사본부의 안내방송에 맞춰 OMR 카드가 배포되었습니다. 학생들은 학번과 이름, 과목명, 과목 코드를 표기합니다. 그리고 이내 시험지도 배부됩니다. 학생들은 시험지의 매수와 문항수, 프린트 상태 등을 재빠르게 체크합니다. 이상이 없으면 시험지를 반으로 접고, OMR 카드를 시험지 위에 올려놓은 상태에서 시작종이 울릴 때까지 눈을 감고 기다려야 합니다. 누구 하나 시험지를 미리 보거나 하는 행동은 할 수 없습니다.
시작종이 울리자마자 학생들은 시험지를 펼쳐서 문제를 풀기 시작합니다. 밖에서는 비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지만 그 소리는 침묵 속에 잠식되었고,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만 윙윙~ 들립니다. 최대한 학생들의 시험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저는 무소음 단화(?)를 신고, 향이 짙은 화장품과 핸드크림도 피하고, 움직이면 부딪혀서 소리가 날 수 있는 장신구도 모두 생략했습니다.
학생들이 열심히 문제를 풀고 있는 사이 저는 선생님으로부터 도장을 받아 돌아가며 OMR 카드 확인란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시험 감독관 서류에 제 이름을 적고, 사인을 했습니다. 이후부터는 교실 뒤편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숨죽이고 학생들을 바라봅니다. 문제는 잘 풀고 있는지, 혹시 자거나 조는 친구는 없는지, 손을 들어 무언가를 문의하는 친구는 없는지 계속 살폈습니다. 그런데 시험 시작종이 울린 지 5분도 되지 않아 엎드려 자기 시작한 남학생이 보였습니다. 교차로 앉아있는 줄을 헤아려보니 고3이더군요. 한국사 시험이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닐 텐데 3번으로 줄을 세우고 잠을 청하는 친구의 뒷모습을 보며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독 선생님도 OMR 카드를 확인하고는 깨우지 않고 놔두셨습니다. 다행히 그다음 시험 시간에는 자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서 한결 마음이 놓였답니다.
시험 종료 10분 전, 고사본부에서 안내방송이 송출됩니다. 풀이가 완료된 문항부터 먼저 마킹을 하라고 말이죠. 생각보다 시험 시간은 길었습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뒤에서 학생들을 지켜봐야 하는 제 관점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아홉 페이지에 달하는 영어 독해 시험지를 풀어야 하는 고3 학생들은 시험 종료 1분 전까지 문제를 풀고 있었으니까요.
시험 종료 1분 전, 종료를 알리는 벨이 울렸을 때도 손에 필기구가 들려있다면 그건 부정행위로 간주한다는 방송이 흘러나옵니다. 그러니 마킹을 마무리하고, 필기구를 모두 책상 서랍에 넣은 뒤 손을 머리 위에 올리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하나 둘, 머리 위에 손을 올립니다. 그리고 마침내 시험 종료를 알리는 벨이 귀가 따갑도록 울리자 선생님은 그보다 더 큰 목소리로 "옆 사람에게 OMR 카드 넘길 때 자신의 카드는 밑으로, 빨리빨리" 하고 외치십니다. 이로써 저의 2시간 20분에 걸친 시험 감독도 끝이 났습니다.
이 땅의 모든 고등학생 여러분, 오늘 하루도 너무너무 수고 많았어요. 마지막까지 힘내서 후회 없는 시험 치르길 바랄게요~!!
덧.
퇴고를 마친 글 한 편을 올리기 전, 최종 허락을 구하기 위해 막내에게 글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보기 좋게 퇴짜를 맞았습니다. 딸아이와 상담센터를 다녀온 사연, 4회기 만에 종료된 상담센터 이야기를 두 편에 나누어 적을 생각이었는데... 아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적지 말라고 했습니다. 언젠가는 이 긴요한 이야기를 들려드릴 날이 오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