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보는 누구의 몫일까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를 나섰다. 아침부터 분주히 채비를 마치고, 설레는 마음을 가득 안은 채 1시간 여 남짓 걸리는 공항행 직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언제부터인가 이른 아침 비행은 익숙하지만, 그 여정의 피곤함은 정오가 채 되기 전에 눈 밑의 거무스름한 그림자와 꽉 찬 모래주머니를 매단듯한 발걸음과 함께 한 번에 밀려온다. 김포에서 강남으로 나오는 지하철에 선 채 몸을 실은 지 몇 정거장 되었을까, 손에 든 핸드폰에 온몸을 집중하고 있던 앞 청년이 주섬주섬 일어날 채비를 한다. 순간 너무 기쁜 나머지 그를 힘껏 일으켜 자리를 비운 후 내 엉덩이를 재빨리 들이밀 뻔하였다. 자리에 앉아 여유를 부리며 주위를 한 번 둘러본 후 자리를 양보해야 할 누군가가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였다. ‘하하, 이제 나도 나이가 드나 보다...’ 싶었다.
열차가 서서히 속도를 늦추며 다음 정거장에 멈출 준비를 했다. 문이 열리고, 머리가 희끗한 60대 초반으로 짐작되는 할머니 한 분이 자리가 있나 주위를 둘러보며 서둘러 들어오셨다. 순간 나는 조용히 머리를 숙이고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내 옆에 앉은 학생이 일어나겠지. 아니, 누군가 더 젊은 사람이 자리를 양보하겠지. 조금 서서 가셔도 되는 나이인 것 같은데 정 안되면 옆칸 노인좌석으로 이동하시겠지. 할머니가 내 앞에 서성이는 인기척이 들렸지만 난 눈을 뜨지 않았다. 아니 뜨고 싶지 않았다. 눈이 마주치면 양심 상 난 어김없이 무거운 가방을 짊어지고 자리를 비켜서야만 할 테니. 아직 삼성역까지는 40분이 넘게 남았는데 서서 갈 순 없잖아. 시간이 좀 흘렀나 싶어 이젠 내 앞에는 안 계시겠지라는 짐작에 살짝 실눈을 떴다. 놀랍게도 아직 내 주위에서 자리를 양보할 누군가를 찾고 계셨다. 이쯤 되면 노인석으로 자리를 옮기실 법도 하지 않을까? 마음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들이 교차하였다. 자리를 비켜설까, 다시 잠을 청할까 갈등하는 나를 발견하였다. 대한민국에서 같은 시간을 사는 서로 다른 세대 간의 암묵적인 기대 또는 보이지 않는 줄다리기라 해야하나.
얼마 전 비슷한 에피소드가 있었다. 제주행 비행기 보딩을 위해 긴 줄 대열에 끼어 있는데, 누군가 내 신발 뒤꿈치를 밟았다. “아이고, 이 할머니가 미안합니다.” 뒤를 돌아보니 딸과 함께 집에 가시는 나이 지긋한 할머니였다. 보딩을 위해 한 참 줄을 서있었던 탓에 마음이 조급해 발걸음을 떼시다 내 발과 접촉사고가 난 것이었다. 딸도 함께 미안해했다. “요새는 아이가 있는 가족만 빨리 보내주고, 나 같은 늙은이는 줄 서래.” 그랬다. 60대 이상 인구는 증가하는데, 신생아 출생률은 급속히 줄어드는 탓에 아이가 있는 집이 최우선이란다.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10여 년 전과는 사뭇 다른 지하철 안, 비행기 보딩 대기열의 모습을 보며, 양쪽을 다 겪은 난 그 중간 어디쯤 웃어른 공경이냐, 아이 사랑이냐, 내 자신이냐 누구를 우대해야 할지 알쏭달쏭하다.
지하철 안 임산부 석은 텅 빈 걸 자주 보는데, 노인석은 늘 북적인다. 나에게 노인이라 칭하는 그 날이 오게 된다면, 난 과연 어떤 마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