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바자회에 오세요
얼마 전 아이들이 다니는 중학교에서 학교 발전 기금 마련을 위해 지역 주민과 함께하는 바자회가 열렸다. IB학교라는 명분으로 겉으로 보이는 시설은 좋아졌지만, 작년 대비 급격히 늘어난 학생 수에 반해 교육 예산이 줄어들어 일부 학년의 봄 수련회가 가을로 미뤄진 것이 발단이 되었다. 학교 학부모회에서 처음 여는 행사인 만큼 관련 임원진들은 행사 사전 준비를 비롯해 교육청 유관 부서와의 협의 및 행사 승인으로 꽤 힘든 여정이 있었다고 한다. 평소 여러 가지 이유로 학교 학부모회 활동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아이들의 학교 생활이 조금 더 윤택해질 수 있다면 부모로서 당연히 봉사 활동에 참여해 조금의 힘이라도 보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9년 동안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왔지만, 그동안 직장에 다닌다는 이유로 행사 당일에 조차 참석이 어려웠는데, 제주에 와서 IB 공립학교를 보내면서 관심과 애정의 정도가 그 어느 때와는 다른 게 사실이다. 떡볶이를 담당하는 둘째 아이 친구 엄마가 행사 당일 와서 좀 도와달라는 것이 개기가 되었다. 바자회 행사 봉사 활동을 위한 엄마들의 사전 모임이 이루어졌고, 나는 오전 6시 음식 준비부터 오후 1시까지 담당하기로 하였다.
내가 사는 동네의 마을 회관에서는 주민 행사가 곧잘 열린다. 표선리민 개개인의 장례식, 결혼식, 피로연, 칠순잔치를 비롯해 체육회, 부녀회 잔치 등 마을 행사가 있으면 내가 사는 빌라에 거주하는 정육점 삼춘이 돼지고기를 삶으신다. 적게는 1,000명, 많게는 2,000명이 먹을 수육을 준비하시고, 보통 그 양이 200kg가 넘는다고 한다. 제주에서 돼지고기는 특별하다. 집에서 기르던 소위말하는 똥돼지는 과거 자식 육지 뒷바라지나 결혼 등 큰 행사가 있을 때만 잡았던 귀한 재산이었다. 아직도 마을의 귀한 행사가 있을 때면 돼지고기가 등장한다. 이번 학교 바자회도 어김없이 수육이 등장했다. 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모이는 큰 행사임이 틀림없었다.
새벽부터 졸린 눈을 비비며, 비가 오는 꾸물한 날씨를 탓하면서도 부디 오늘의 바자회가 잘 되어 아이들의 학교 생활에 좋은 밑천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마을 회관에 들어섰다. 학부모 한 명 한 명 마치 전투에 참여하는 전사들처럼 앞치마를 두르고 손에는 재각기 도마, 칼 등 음식을 위한 장비를 거머쥔 채 각 학년이 맡은 음식 준비를 위해 결의에 찬 모습으로 주방에 들어섰다. 재료를 맡은 분들이 속속 재료를 펼쳐놓으면 김밥 속 준비를 위해 당근과 오이를 채칼로 깎고, 썰고, 맛살과 햄을 굽고 넓은 프라이팬에 계란 지단을 완성해 나갔다. 설거지도 척척 재빠르게 이루어졌고, 손님을 맞이하게 위해 떡볶이, 비빔밥, 해물파전, 소떡소떡, 닭꼬치 등 다들 음식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큰 솥에 밥이 익어가고 그 옆에서는 미소 된장국이 보글보글 끓어갔다. 장마 예보에 물건을 파는 야외 천막은 좁은 실내로 들어와야만 했지만, 유채꿀, 참기름, 미숫가루, 수제딸기잼, 초당옥수수 등 시골 장터에서만 구할 수 있는 귀한 물건들이 속속들이 단장을 마쳤다.
개장하기 직전 부슬부슬 비가 오는 입구에서 봉사단 학부모들과 어우러져 단체사진에 얼굴을 박으며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이런 행사는 중국에서 아이들을 국제학교에 보낼 때도 분명 있었는데, 왜 감회가 남다른걸까. 학비가 비싸기에 교육 예산이 늘 넉넉한 사립학교에서는 이런 행사가 그저 외형적으로 보이는 정기적 이벤트에 불과했을지 모르겠다. 오늘의 이 행사는 무엇보다 아이들의 행복한 학교 생활을 위한 학부모들의 마음이 한 곳에 모여졌기에 다른 것일까. 그 이유는 9시 개장을 하고 손님을 맞이하면서 더욱 분명해졌다. 영문도 모른 채 홀 주문과 서빙을 담당하게 된 나는 생전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아침부터 밀려들어오는 손님들로 주문지가 쌓이고 순서대로 음식을 받아 자리에 가져다주기 위해 비지땀을 흘리며 종종걸음으로 실내를 누비는 와중이었다. 노인회에서 14분이 오셔서 비빔밥과 해물파전, 막걸리를 주문하셨다. 마을 119 소방대원분들 20명가량이 큰 방 하나를 차지하고 푸짐한 아점을 드셨다. 나이 지긋하신 삼춘분들이 손에 손을 잡고 회관으로 들어서셨다. 동네 아이들이 부모 손을 끌고 와 떡볶이와 닭꼬치를 먹어치웠다. 남편도 아이들과 동생네를 이끌고 한 자리를 차지해 주었고, 멀리 제주시에서 지인들이 찾아온 손님들도 있었다. 이런 게 시골에서 말하는 연대일까? 갑자기 마음이 울컥했다. 대부분 얼굴을 모르는 이웃이고, 낯선 이방인으로 마을에 들어서 산지 1년이 채 안된 나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 자식의 일인 마냥 마을에 있는 학교를 돕기 위해 귀찮은 걸음을 마다하지 않고 배를 두둑이 채우고 양손 가득 물건을 싸들고 돌아가는 것이었다. 서울에 살았더라면 이런 경험이 가능했을까? 그저 내 아이만 바라보며, 내 가족의 일에만 집중하기에도 빡빡한 도시 생활이었다. 마을의 학교일이 당신의 일인 것처럼 이웃사촌이 되어 한 마음으로 되살려내는 따뜻한 온기. 쾌청한 날 앞마당에서 신명 난 놀이판이라도 벌어졌었더라면 바자회에서 피어난 연대는 더욱 활활 타올랐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궂은 날씨에도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던 마을 회관의 축제 분위기는 그에 못지않은 진풍경이었다.
아이들의 학교를 위해 선택한 이 작은 마을에서, 내 아이들만 바라보고 자리 잡은 이 조그만 터전에서 보이지 않는 거대한 마음의 울타리와 온정을 느끼면서 타지에서 온 이주민으로써 나만의 이익을 생각했던 내 모습이 표선 앞바다의 작디작은 모래알같이 느껴졌다. 나는 이 마을에서 이 연대를 개기로 깊게 뿌리내릴 수 있을까, 묵직한 질문이 겹겹이 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