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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의 철학

일의 시간표에서 읽는 삶의 방식

by 제주로컬조이

김연수 작가 에세이 <소설가의 일>에 이런 구절이 있다. 자영업자가 아침에 가게 문을 여는 광경은 일출처럼 당연했다. 그들에게는 일의 반대가 휴식이 아니라 손해다. 길거리에 즐비한 가게들을 보면, 그 말을 실감한다.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 살 때는 말이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네온사인과 화려한 매장 불빛은 누가 제일 나중에 꺼지나 또는 꺼지지 않나 경쟁이라도 하듯 밤을 다툰다.


그런데 제주에 살아보니 자영업자의 삶이 꼭 그렇지만은 않음을 알게 되었다. 병원이 문을 닫고 1시간쯤 지난 저녁 7시면 벌써 셔터 문이 내려가있는 동네 약국. 오전 11시에 문을 열어 2시까지만 점심 장사를 하는 위미 모 밥집. 네이버 플레이스에는 분명 오늘 휴무가 아닌데, 찾아가 보면 귤 수확 철이라 며칠 휴점한다는 성산 모 국숫집. 서귀포 신시가지에 가보면 알겠지만, 웬만한 식당들은 일요일은 모두 휴무다. 동네 사람들을 상대로 한 가게들은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하다. 우리 동네 해변 가장 좋은 바다뷰에 목을 둔 카페는 여행객들이 붐비는 7-8월에도 저녁 6시면 이미 문이 닫혀있다. 내가 좋아하는 김밥가게 사장님도 관광객들이 줄 서는 걸 마다하고 정오가 되면 가게 문을 잠근다. 물론 밤늦도록 불화성을 이루는 맥줏집, 노래방이 밤거리를 적적하지 않게 채워주기는 한다. 하지만, 24시간 불이 켜져 있는 곳은 몇 군데 편의점뿐. 그 편의점도 가끔 늦은 밤에 찾아가면 불이 꺼져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자영업자라면 하루 쉬는 게 분명 손해인데, 왜 제주는 다른 모습일까. 혼자 곰곰이 생각해 본 이유를 늘어놓자면 (경기와 상관없이), 크게는 전혀 다른 라이프 스타일이다. 철마다 땅에서 솟아 나오는 먹을거리가 즐비하기에 이웃을 잘 사귀어두면, 옥수수, 파, 양파, 감자, 상추 할 것 없이 일용한 양식이 서로의 식탁으로 바삐 오간다. 최근엔 야채, 과일을 돈 주고 장 보는 일이 크게 줄었다. 많이 벌자고 작정하지 않는 이상 ‘먹고사는 일’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거리가 적은 셈이다. 빡빡하지 않은 일상, 조금은 느리지만 그래도 괜찮은 일상 또한 한몫을 한다. 얼마 전 중문컨벤션센터에서 한 해 만 명이 넘게 방문하는 꽤나 큰 박람회가 열렸다. 그런데 너무나도 신기하게 폐장 시간이 저녁 6시인데 5시면 참가 업체들이 뒤늦게 들어오는 관람객을 뒤로한 채 슬슬 짐을 정리해 집에 갈 채비를 하는 것이다. 관계자에게 물어보니, 제주도는 원래 그렇단다. 코엑스 박람회에서 절감한 폐장 시간이라 함은 저녁 6시가 아닌 관객들이 다 빠져나간 후라는 사실도 여기에서는 당최 안 먹히는 법칙인 셈이다. 오후 5시가 넘으면 한산했던 아파트 주차장이 하나 둘 채워져 어느새 모두 귀가해 있음을 알게 되는 걸 보면, 도로를 환하게 비출 가로등이 굳이 없어도 됨을 십분 이해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영업자들이 많은 제주에서 ‘쉼’이라는 단어는 제주도에 사는 사람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삶의 일부인 것 같다. 단지 끝없이 달리다 지쳐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제주를 찾는 방문객을 위한 단어가 아니라, 예측하기 어려운 날씨와 계절의 변화 속에서 하루하루를 먹고살기 위해 부단히 그리고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언어. 제주에 정착하여 그 속살을 하나씩 들여다보면서, 전엔 아주 쉽게만 생각했던 그리고 흔하다고만 여겼던 ‘쉼’이라는 단어를 삶의 방식의 일부로써 재조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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