뙤약볕 아래 익어가는 것들
따가운 7월 말 뙤약볕을 등에 지고, 부모님이 고향 경북 영천으로 귀농하신 지 햇수로 2년 만에 나는 처음으로 과수원 일을 도우러 갔다. 근처 작은 아파트를 장만하여 이사하셨기에 보금자리도 구경할 겸 해서였다. 올해 초 엄마 칠순 선물로 부엌에 ㄱ자로 놔드린 싱크대와 베이지색 타일도 예쁘게 잘 자리를 잡았는지 보고 싶었다. 중3인 큰 아들은 작년 여름방학 때 동생네와 함께 복숭아와 자두 수확을 도우러 내려온 적이 있다. 부모님은 올해 수확량이 작년만큼 되지 않을 거라고 적지 않게 실망하셨지만, 큰 아이는 마음 한 켠으로 일거리가 적을 것임에 안도하는 눈치다. 이른 아침을 서둘러 먹고 해가 중천에 뜨기 전에 일찌감치 과수원으로 향했다. 아이들은 할아버지의 중고 트럭 뒤 짐칸에 스스럼없이 올라탔다. 사다리, 연장, 수확 바구니, 간식, 물병 보따리와 함께 실려 덜컹거리는 논두렁길을 달리면서도 연신 웃음을 잃지 않는 걸 보며, ‘고생하러 가는 길이 저렇게 신이 날 수 있을까?’ 내심 신기하기만 했다. 2주 전 억수 같은 장맛비로 물에 잠긴 지역이 많았는데, 부모님 농장은 다행히 큰 피해가 없었다. 대신 풀이 급속도로 무성하게 자라고, 약을 제때 치지 못해 올해 딱딱이 복숭아는 탄저병으로 일부가 물들었다. 맛 좋고 실한 왕자두는 까치 등의 산새들에게 이미 기습을 당한 터였다.
더위에 숨을 헐떡이며, 대프리카의 날씨를 몸소 실감한 채 꼬박 한 나절을 일했을까, 복숭아와 자두가 바구니에 가득 쌓여가고 주렁주렁 과실이 매달린 나무의 개수는 하나 둘 줄어들었다. 엄마는 예년에 비해 많이 마르셨고, 그 탓에 힘이 달려 그늘에 주저앉기를 여러 번 하셨다. 그간 5도 2촌 생활로 이제 제법 농부내가 나는 아빠도 일흔 중반을 향하는 나이는 어쩔 수 없음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중3, 중1 아이들 둘이 복숭아와 자두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번쩍 들어 나르는 광경을 지켜보신 부모님은 무척 뿌듯해하셨다. 더운 날씨를 탓할 수도, 힘든 노동에 투정을 부릴 수도 있는데, 두 아이들은 어릴 적 할머니, 할아버지가 키워주신 노고를 잊지 않고 있는 듯했다. 하나라도 더 제값을 받고 팔 수 있기를 고대하며, 낮 수확동안 얻은 복숭아 털샤워로 여기저기 몸이 가려워 긁어대면서도 널찍한 마루에 한가득 쌓인 복숭아를 상품과 파치로 구분해 나가는 아이들의 손길이 바지런하기만 했다. 상품 가치가 있는 과실들은 아침 일찍 농협 경매에 실어내가기 위해 박스 안에 담겨 포장되었고, 상처가 나거나 벌레가 생긴 과실들은 이웃과 나눠먹기 위해 한 켠에 정리되었다. 그럴듯한 선과장은 없지만, 손으로 일일이 과실들을 분류하고 포장하며, 수다도 떨고 복숭아도 깎아 먹고 시원한 자두 주스도 만들어 마시면서 오붓하게 둘러앉은 삼대의 관계는 한 없이 무르익어갔다.
한 해의 농사 여정은 지난하다. 그러나 그 값을 돈으로 보상받는 시간은 24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조그마한 상처가 나도 상품 가치로 인정받지 못해 내 입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 아픈 건 눈으로 몸으로 직접 경험한 이번이 처음이다. 내가 마트에서 과일을 사 먹을 때는 예쁜 상품이 맛없는 경우가 많은데.. 못 생기고, 상처 나고, 벌레가 좀 먹었지만, 씹으면 과육즙이 줄줄 흘러내리는 자두와 아삭아삭 달콤함이 오래 남아 자꾸만 손이 가는 복숭아를 눈앞에 두고, 다른 집에 가서도 나에게처럼 융숭한 대접을 받으면 정말 좋겠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네 부모님은 부지런하시다. 자신의 뼈를 갈아 나무를 키우고 과일을 따내신다. 더위쯤이야 해 없는 이른 아침에 일을 시작하면 문제없다는 식이다. 그렇게 정성으로 자식 키우는 것과 같은 마음을 다하시기에, 가방 안에 꾹꾹 담아 싸주신 과실들을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며 연신 포크로 찍어 내 입속으로 넣는 행복을 만끽할 수 있는 이 여름이다. 아이들의 여름방학도 오늘이면 끝이다. 그들의 기억 속에 이번 여름방학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한 과수원에서의 달콤 챕터로 채워지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