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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茶와의 첫 만남

차가 건넨 조용한 위로

by 제주로컬조이

차를 아주 특별하게 생각하게 된 인생의 계기가 있다.


중국이라는 낯선 이국땅에 정착한 지 3년이 다되어 가던 해, 나의 몸과 마음은 오늘 당장에라도 비행기표를 끊어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을 만큼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바람 한 점 없이 끈적한 습기로만 꽉 채워진 5월 광동성의 공기는 내 몸을 매일 물에 푹 젖은 솜뭉치로 만들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날도 어김없이 공중에서 자전거를 타는 곡예사 마냥 가정과 회사 일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하루의 끝이라는 무대 막이 내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자주 있는 일이라 낯설 것도 없었지만, 극심한 스트레스로 목 뒤가 뻣뻣했고, 안구는 말라 뻑뻑했고, 오른쪽 관자놀이엔 시차를 두고 지끈지끈 편두통이 찾아왔다.


대부분의 낮 시간을 책상 앞에서 보내는 직업 특성상 허리 통증도 꽤 잦았다. 그래서 척추의 무리를 덜기 위해 비대칭한 좌우 균형을 맞추고 허리 근육을 만드는 밸런스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맨손 체조와 요가 사이 어디 즈음인 단순한 동작들로만 이루어진 이 운동은 일주일에 두 번,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하는데 꽤 효과적이었다. 선생님은 광저우가 고향인 앳된 20대 후반의 여성으로 나의 비루한 중국어 실력은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서로 잘 통했다. 수업 내내 여기저기 아프다며 엄살을 부린 나를 요리조리 관찰한 그녀는 수업 후 넌지시 물었다. “차 한잔 하시겠어요?” 중국인이 끼니보다 자주 마시는 차가 뭐가 그리 특별할까 싶었다. 단지 목이나 축이고 집에 가야지 싶어 가볍게 수락했는데, 심드렁한 표정을 읽었는지 그녀는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운동 후 마시는 차 한 잔은, 단순한 차 그 이상의 것이에요.” 그녀는 커다란 차판 위에 찻잔과 도구들을 가지런히 놓고, 전기포트에 물을 부었다. 곧이어 보글보글 끓어오른 물이 포트 뚜껑에 부딪히며 철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녀는 차가 잔뜩 담긴 바구니를 끌어당겨 무슨 차를 마실지 잠시 고심하다 하나를 골라냈다. 저녁이라 속이 쓰리지 않고 잠에 방해가 되지 않는 녹차류가 좋겠다고 했다.


찻잎 봉투를 뜯어 까이완(뚜껑 있는 잔)에 붓자, 바싹 말라비틀어진 검붉은 찻잎과 잘게 저며진 노란 국화가 함께 흘러내렸다. 그녀가 능숙한 손길로 끓는 물을 위에 덮어 부으니 찻잎은 물속에 한번 깊숙이 잠겼다 떠오르며 움츠렸던 몸뚱이를 조금씩 펼쳐내는 듯했다. 잔에 차오른 첫 물은 버려졌다. 이내 다시 뜨거운 물이 찻잎을 푹 적시니 반쯤 펼쳐졌던 찻잎은 김이 차오른 욕조에 가로누워 반쯤 떠있는 나의 모습 마냥 잔 속에서 서서히 부풀어 올랐다. 그녀는 우려낸 차를 잔에 담아 내 앞에 건넸고, 그녀의 잔에도 차를 채웠다. 나는 잔을 들어 잠시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옅은 황색 빛이었다. 물에서 우려 져 나온 미세한 찻잎 가루 찌꺼기가 서서히 밑으로 가라앉았고 그 잔상이 나의 흩어진 마음 조각들과 교차하였다. 잔 속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김이 코끝을 스치며 깊은 차향으로 바뀌고, 이는 비강을 통해 나의 깊숙한 영혼까지 침투했다. 그 향에 심취해 잠시 눈을 감았다 뜨길 반복했고, 눈을 뜨고 내려다보니 손의 떨림으로 인해 차 표면에 작은 물결이 일었다. 아직 뜨거운 김은 가시지 않았지만 서둘러 입에 가져가 보았다. ‘하.. 따뜻하다.’ 추운 겨울, 정류장에 서서 오지 않는 버스를 1시간째 기다리며 떨고 있는 나를 누군가가 다가와 품에 넣고 꼭 안아주는 듯했다. 애썼다고..


난 사실, 그날 그 차의 맛과 향기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얼어붙었던 몸과 마음을 녹아내리게 할 만큼 따뜻한 온기가 있었던 찻자리는 선명하다. 기도를 타고 뜨거운 물길이 생긴 순간 목 뒤의 통증을 자극하던 신경 일부가 함께 녹아내리는 듯, 생전 느껴보지 못한 경험으로 아찔했다. 두통을 좀 줄여보고자 타이레놀 2알을 삼킨 지 1시간이 지난 것도 아니었다. 손맛 좋은 마사지사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떡 주무르듯 주물러 댄 것도 아니었다. 45도 온수에 라벤더 향 바디 솔트가 담긴 욕조에서 반신욕을 즐긴 것은 더더욱. 차와 마주한 짧은 몇 분, 그 몇 모금이 내 긴장의 빗장을 열어 영혼을 꺼내어 마른 햇볕에 펼쳐놓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구석구석 끼어있던 너저분한 찌꺼기를 고스란히 빼내어 가버렸다.


차와의 이 특별한 만남으로 인해 나는 차에 한 발짝 다가가게 되었다. 알고 싶고, 친해지고 싶고, 누군가에게 소개하고 싶어졌다. 조금은 낯선 말이지만, 차와의 내밀한 연애가 시작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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