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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 그리고 차茶

절뚝이던 삶을 다시 걷게 한 것들.

by 제주로컬조이

나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이 몸과 마음의 안식처라면 남편에겐 오름이 그런 존재이지 않을까.


2년 전 가을, 우리가 중국에 머물 때 그는 축구라면 자다가도 눈이 번쩍 뜨이는 그 애정하는 운동을 하던 도중 오른쪽 다리에 큰 부상을 입었다. 주말이면 어김없이 모이는 한국 조기 축구회처럼 중국인 직장인 아저씨들로 구성된 우당탕탕 동호회에서의 경기 도중이었고, 그는 그 틈바구니에서 자랑스러운 한국인임을 증명하고자 어떻게든 몸싸움에서 이겨보려 몸부림을 치다 잔디에 나뒹굴었다. 그 광경을 고스란히 지켜본 큰 아이의 말을 빌자면 말이다. 처음엔 그저 단순한 인대 손상이라 생각해 치료를 미루다 한국 출장을 기회삼아 미팅 장소 인근에 있는 동네 정형외과에서 진료를 받았다. 한쪽 다리가 바닥을 지지하지 못하고 흔들거리다 이내 힘없이 풀어져버리는 상태를 본 의사는 아무래도 대형 병원에 가보는 게 좋겠다며 소염 주사 한 대를 놔주고 소견서를 써서 그를 돌려보냈다. 삼성서울병원에서의 최종 진단 결과는 후방십자인대 파열. 운동선수들, 특히 축구 선수들에게 전방십자인대 파열은 꽤 흔한 부상이라 수술 후 2-3개월 만에 복귀해서 경기에 뛰는 일이 허다하다고 한다. 하지만, 후방십자인대는 달랐다. 외국에서 조차 해당 부위의 파열 사례를 찾아보기 쉽지 않아 수술 자체도 까다롭고, 수술 후 예후를 알 수 없어 평생 다리를 절 수도, 무릎 꿇고 앉을 수도, 뛰거나 과격한 운동을 할 수도 없고, 인대가 재파열되어 여러 차례 수술을 받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의사의 얘기에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한 그였지만 복잡한 심경이 그의 얼굴에 그림자로 드리웠다. 그렇게 수술을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의대증원 문제로 대형 병원 의료진 파업이 시작되었고, 오리무중이었던 남편의 후방십자인대 재건술은 긴 4개월의 터널을 지나 마침내 이루어졌다.


다리를 다친 후 수술 전까지 반년 동안 어깨가 축 처질 때로 쳐진 채 한쪽 다리를 절며 절뚝거리는 남편의 뒷모습이 얼마나 처량하고 애처롭던지 혼자 여러 번 눈시울을 붉혔던 기억이 난다. 열 살 때부터 축구 선수를 꿈꾸던 남편은 그야말로 운동광이었고, 사내아이 둘을 키우면서 동네 아이들까지 모아 체육 선생님을 자처했고, 은퇴하면 꼭 아마추어 축구 심판을 하겠노라 마음속 깊은 곳에 꿈을 고이 접어 미뤄두고 있었다. 그랬던 사람이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되면서 좋아하는 운동을 그냥 지나쳐야 하니 자연스레 자신감이 떨어졌고, 작은 일에도 신경이 몹시 곤두서곤 했다. 호르몬이 급변하는 중년 남자들의 갱년기는 여자 못지않다는 얘기가 있는데, 아마 그는 마흔 초반에 갱년기와 흡사한 시간을 보냈을지도 모르겠다. 말수가 적어지고, 내 얘기를 듣다가도 짜증 내는 일이 잦아졌다. 두 달간 홀로 중국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동안, 그는 친정엄마로부터 보호자 동의 사인을 받고 수술을 마치고 친정집에 기거하며 엄마로부터 병시중을 받았다. 전생에 우리 엄마와는 무슨 사이였을까. 다리에 깁스를 한 채 장모의 손을 빌어 화장실을 가고, 머리를 감고, 반쯤 누워 처제로부터 생일상을 받았다. 수술은 잘 되었고 잘 지내는 줄만 알았는데, 어느 날 전화 너머로 한국에 돌아와 살자는 남편. 6년간 고생하며 생활 터전을 가꾼 중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완전히 돌아오고 싶어 했다. 시어머니가 아프셨기에 자식 된 도리로써 마음이 쓰이던 시기였기도 했지만, 그의 후방인대파열 사건은 어쩌면 그에게 있어 더 이상 타지에 있고 싶지 않은 결정적 이유였을지 모르겠다.


수술 후에도 그는 한 동안 오른발을 바닥에 디딛는 것조차 돌 지나 처음으로 걸음마를 떼는 아기 마냥 조심스러워했다. 나 또한 잠잘 때 그의 수술 부위에 몸이 닿을 까 한쪽으로 돌아누워 자는 바람에 눌린 어깨가 저릿할 때가 여러 번. 외출할 때면 그가 사람들과 부딪혀 넘어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했고, 식당에 들어서면 목발을 놓기 쉬운 좌석이 있나 없나 먼저 둘러보았다. 그렇게 서로에게 조심스럽게 하루하루를 보냈고, 수술 한지 만 5개월의 재활 끝에 그는 의사에게 낮은 경사의 언덕은 산책해도 괜찮다는 답을 받아냈다.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잘 걸어보고자 전념했기에, 얼마나 간절한 눈빛으로 의사와 얘기했을지 짐작이 간다. 보호대 안으로 가득 스며든 땀으로 곳곳에 번진 습진, 꽉 조인 탓에 깊숙이 패인 보호대 자국, 목발을 짚다가 생긴 어깨 통증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다니. 그간 보호대를 차고 목발에 의존하여 집 앞 바닷가 평길을 15분에서 20분 걷는 정도만으로 만족해야 했는데, 더 이상 보조 기구 없이 두 맨다리로 오름 운동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 집은 나지막한 오름이 포진해 있는 동쪽이라 주위만 한번 둘러봐도 오름이 눈에 걸리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갈 수 있었기에 그의 마음은 아마 더 절실했을 것이다. 서울에 출장이라도 가게 되면 한쪽 종아리부터 무릎까지 둘러 덮은 보호대며, 거추장스럽기 그지없는 목발과 동행하여 꽤 귀찮아했지만, 지금 와 새삼 돌이켜보면 비행기에 탑승할 때마다 쏟아지는 관심과 융숭한 대접은 생각날거다.


그 후 그는 오름지도를 펼쳐 오를 수 있는 오름을 살폈고, 가파르거나 험준하지 않은지 리뷰를 수집했고, 그만의 오름 리스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한 개, 두 개 운동이 가능한 오름이 늘면서 절뚝거리던 다리도 서서히 균형을 찾고 근육이 조금씩 붙으면서 쳐졌던 그의 어깨도 좁아졌던 마음의 평수도 제자리를 찾아갔다. 따라비오름과 머체왓숲길을 유난히 좋아하는 그는 턱까지 숨이 차게 올라 땀을 흠뻑 흘리는 순간, 그리고 그 정상에서 한눈에 펼쳐진 하늘, 바다, 땅을 내려다보는게 그렇게 감동적이라 한다. 무슨 마음인 지 알 것만 같다. 운동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하루아침에 스파이더맨의 거미줄 타는 능력을 소실한 것만 같은 경험을 하고, 마침내 축구는 아니지만 그와 아주 비견할 만한 삶의 원동력을 찾은 것이다. 내가 차에서 발견한 우연한 첫 만남처럼 그가 오름에서 발견한 우연한 첫 만남은 꽤나 닮은 꼴이다. 우리 부부는 주말이면 남편의 오름 리스트를 펼치고, 근처에 내가 가고 싶은 찻집을 찾는다. 오름에 올라 한껏 땀을 흘리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려와 찻집에 들어서면 차가 나오기도 전에 차향과 온기로 인해 빠르게 뛰었던 심박동 수가 제자리를 찾는다. 서로가 마치 알지 못했던 오름과 차에서 각기 얻는 이 두 기쁨이 합쳐지니 완벽한 하나의 루틴이 되어간다.


‘여보, 우리 차. 오름이라는 거 만들어보면 어때? 오름 콘셉트의 찻집에서 우리가 올랐던 오름 사진들을 걸어놓고 좋아하는 차를 마음껏 마시며 이 두 가지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좋겠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농담처럼 입 밖으로 꺼내니 남편이 받아친다. ‘차. 오름 말고 오름. 차’. 그도 어쩌면 내가 차와의 첫 만남에서 얻은 것과 같이 오름을 통해 절뚝이던 삶을 회복하며 축복과도 같은 위로의 선물을 받은 것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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