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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희 Dec 25. 2022

농담

(밀란쿤데라) 인생을 바꿔버린 농담에 대해.

다음 모임은 크리스마스이브날이네요. 다들 시간 괜찮으실까요?

다행인지 아닌지, 우리 모임원들은 크리스마스이브에 별다른 일정이 없었다. 이불 밖은 위험하다는 말을 체감하게 하는 요즘 날씨.(실제로 미국은 영하 50도로 떨어진 지역에서 솜이불을 몸에 둘러싸고 외출한 사람의 사진이 화제가 되었다.) 추워도 너무 춥다.

혹한의 날씨에, 그리고 크리스마스이브날에, 아침 댓바람부터 만나기가 쉽지 않음에도 우리는 약속한 시간이 되자 밀란쿤데라의 수심 가득한 얼굴이 담긴 '농담'책을 손에 들고 하나 둘 약속장소로 모였다.  


이번 책은 각자에게 어떻게 읽혔을까.

일단 완독이 쉽지 않았다는 것이 공통된 반응이었다. 읽기도 전에 500페이지가 넘는 책의 분량에 압도되고, 읽으면서 체코의 역사적 배경과 시대를 지배한 이념의 무게에 다시 한번 압도되었다. 목차별로 등장인물들의 이야기가 각각 펼쳐져 머릿속에 전체얼개를 짜가며 읽어야 했다. 게다가 제마네크? 제네마크? 외국 이름은 세 글자만 넘어가도 어쩌나 헷갈리는지, 여섯 자가 넘는 이름은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때 쯤이야 친숙해졌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너무 좋아한다는 송쌤은 첫 페이지부터 술술 읽어 나갔고, 불과 4일 만에 완독선언을 해 버리는 바람에 우리를 쫄게 만들었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올라와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고 했다.


나는 무조건 완독 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꾸역꾸역 시작했다가 루드비크의 삶에, 그 어리석음에 동화되어 애잔한 마음으로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책을 덮고 나니 체코의 시대적 배경이 궁금해져 인터넷을 뒤져보았다. 1948년 독일의 나치에서 해방된 체코는 소련의 공산주의 이념을 들어와 일국주의를 찬양할 때였다. 이에 대립된 트로츠키의 사상을 소설의 주인공처럼 농담으로 발설한다는 것은 그 시대에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번의 인생밖에 살지 못하지만 책을 읽는 사람은 여러 번의 인생을 산다.'라는 밀란쿤데라의 말처럼 우리는 그의 책 '농담'을 통해 체코의 격동의 한 역사 속에서 살았던 여러 인물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소설의 주인공인 루드비크.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친구의 관심을 끌기 위해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라는 농담을 적어 엽서를 보낸다.

루드비크는 그 엽서로 트로츠키주의자라는 오해를 받게 되고, 학교와 당에서 추방 당해 탄광부대로 보내진다. 실의에 빠진 그를 구원해줄 여인 루치에 와 사랑에 빠지지만, 루드비크는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다. 서로에 대한 이해 없이 어긋나 버린 사랑, 루치에가 그와의 육체적 사랑을 끝내 거부하고 떠나며 루드비크는 사랑에도 실패한다.


그는 자신을 추방한 사회와 동료들에 대한 복수와 증오로 가득하다. 15년의 세월이 흐르고 자신을 추방하는데 앞장선 제마네크에게 복수하려고 그의 부인 헬레나를 유혹한다. 헬레나와의 육체적 관계를 맺고 벼르던 복수에 성공한 줄 알았으나 그는 다시 좌절한다.

헬레나는 이미 제마네크와 결별 직전인 데다가 제마네크에게는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옆에 있었다.

그에게 사랑이란, 증오와 복수심이란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나.


우리가 하는 말과 순간의 선택으로 인해 인생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면? 그것이 그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이념과 충돌해 돌이킬 수 없는 삶을 살게 된다면? 그 과정에서 다수의 사람들의 판단에 의해서 진실이 가려진다면?

그것처럼 인생의 비극이 또 있을까. 무거운 주제이지만 책은 우리에게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던져주었다.


우리는 시대의 변화에 맞춰 적응해 나간 제마네크와 루드비크의 삶을 이야기했다.

"제마네크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자기 입장을 바꾸는 삶을 살았어요. 어떻게 보면 자기중심 없이 가볍게 산 것 같아요. 반면 루드비트는 집단적 시대 이념에 짓눌린 자기 삶의 무게를 내내 감당해야 했죠.

인생의 가벼움과 무거움을 대조적으로 보여준 것 아닐까요."

"좋게 표현하면 유연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지만, 제마네크는 시대의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며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끌고 가는 기회주의자였던 것 같아요." 송쌤과 내가 말했다.


아무리 어두운 터널도 지나면 끝이 보이기 마련이다. 시간이 흘러 시대가 변하기 시작한다.

제마네크의 젊은 여자친구인 브르조바 세대는 지난 세대의 성공과 잘못의 역사에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는 스탈린도 그저 하나의 이름에 불과하다. 우리가 한때 치열하게 살았던 한 역사가 다음 세대에는 그저 지나가 버린 '과거'로 퉁쳐지는 것이 두렵기도 하다는데 우리는 입을 모았다.


루드비크의 추방결정이 내려지던 정치재판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집단적 신념이 종교와 유사해지면 자신들과 다른 것들을 어떻게 배척하는지 잘 보여준 사례이다. 오늘날과 비교하자면 집단적 신념은 '프레임'으로, 개인의 붕괴는 '마녀사냥'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 같다.  


여러 인물들이 있었다. 루드비크의 사랑과 복수를 지켜보며 그를 돕기도, 맹렬히 비난하기도 했던 코스트카. 겉보기에 잘 나가는 커리어우먼이지만 루드비크와 가학적인 성관계 후 그에게 푹 빠져 마지막까지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여준 헬레나. 그리고 가련하고 불쌍한 여인 루치에. 책을 한 번 읽고 그들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우리의 결론은!

혼자 읽으면 40프로 밖에 이해하지 못할 책을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누니, 나머지 60프로가 채워지는 느낌이라는 거다. 분위기에 휩쓸려 우리는 다음 책도 고전인 ‘페스트’로 정했다. 집에 가지고 있지만 완독 하지 않았던 책을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는구나. 책과의 인연은 다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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