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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희 Jan 08. 2023

그래도 우리는 성실하게 내일을 꿈꿀 것이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책장 한 켠에서 고이 잠자고 있는 책을 다시 펼쳤다.

2년 전쯤일까. 코로나가 한창 기승을 부릴 때였다. 일상의 모든 것을 뒤바꿔 버린 초유의 질병 사태를, 현 상황을 어떻게 견디면 좋을지 성인의 조언을 구하는 마음으로 카뮈의 페스트를 읽었었다.


그러다 책의 중반쯤 넘어설 무렵 조용히 책을 덮었다. 1947년에 출간된 책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페스트는 현재의 코로나 상황과 지독히 닮아있었다. 질병에 지친 마음을 책으로 위로받고 싶었던 걸까. 읽는 내내 현실을 두 번 겪는 느낌이 들어 힘들었다. 시대를 초월한 명작 속에서 나만의 해답을 구하기도 전에 완독을 포기하고 말았다.


이번 독서모임 책을 '페스트'로 어떨까요?

전 쌤의 제안에 미뤄둔 숙제를 들켜버린 것 같아 살짝 겁이 났다. 완독을 포기한 책을 다시 펼치기까지 작은 용기가 필요했다. 책장의 가장 아래 칸에 놓아뒀던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뒷 표지에 박혀있는 사진 속의 카뮈가 눈에 들어온다. 반쯤 태운 담배를 물고 있는 젊은 카뮈가 나를 노려보는 것 같았다.


고전을 읽는 여정이 쉽지 만은 않다. 작품이 명작인 이유를 찾기 위해 나는 의자에 엉덩이를 꾹 누른 채 버텨야한다. 외롭게 페이지를 넘겨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그제야 무릎을 칠 수 있다. 이야기의 여운이 오랫동안 감돈다. 소설 속 인물들이 하나 둘 머릿속에 되살아나고,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회상하며 이해해 본다. 그리고 현재 우리의 삶과 여전히 닮아 있는 인간의 모습을 발견한다.


페스트 속에도 질병이 덮친 도시에서 극한의 절망을 마주하며 살아가는 여러 인간 군상들이 있다. 영웅이나 극적인 상황을 만들어내는 인물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평범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절망 속에서 어떻게 각자의 삶을 일궈나가는지를 세밀하게 그려낸다.


요양차 샹봉에 가 있다가 아내가 기다리는 알제리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의사 리유와 취재를 하기 위해 오랑시에 왔다가 발이 묶여버린 랑베르.

이들은 페스트로 봉쇄된 도시 속에 갇혀 창살 없는 감옥살이를 할 수밖에 없다.


'이 모든 일은 영웅주의와는 관계가 없다.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이다.'라며 자신이 맡은 직분을 성실히 완수하는 것으로 질병과 맞서는 것을 선택한 리유. 사랑하는 여인의 곁으로 가기 위해 탈출을 모색하지만 떠나기 직전 결국 도시에 남아 리유를 돕는 랑베르. 리유는 직분을 위한 선택을, 랑베르는 사랑과 행복을 찾아가는 선택을 했지만 결국 두 사람은 연대한다. 페스트라는 집단적 고통을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본능일까.


반면 코타르는 범죄자다. 페스트로 혼란한 시국에 경찰이 자신을 쫓을 겨를이 없다는 것을 알고 현 상황이 오래 지속되길 바란다. 소설 속 타루처럼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며 발 벗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코타르처럼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자들도 있다.

죽음을 향해가는 페스트의 고통을 묘사한 부분에서는 질병이 맞설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함에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다.

예심판사 오랑의 아들에게 혈청주사를 시험해 극도의 고통 속에 어린아이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만 보는 장면에서는 대의를 위한 누군가의 희생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 인간의 매정함과 가혹하고 잔인한 현실에 혼자 분개했다.


그렇게 2주가 흐르고, 토독토독(토욜일의 독서모) 모임원들이 모였다.

"저 문해력이 떨어지나 봐요. 읽기 수월하지 않았네요."

나는 여전히 페스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선생님도 잘 읽히지 않았다는 말에 동지를 만난 듯 반가웠다. 나만 어려운 게 아니었구나.


이 질병도 언젠가 끝날 것이라는 희망, 위기를 함께 헤쳐나가기 위한 연대의식, 사람 간의 따뜻한 정과 사랑. 코로나라는 초유의 사태를 겪으며 질병이 인간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고, 사회를 얼마나 빠르게 변화시켰는지에 대해 우리는 열렬히 토론했다.

우리가 그동안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이 엄격히 통제되었던 지난 2년이 스쳐갔다. 우리가 마스크를 벗고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책과 함께하는 소박한 일상이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


새해 첫 모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우리는 2023년 다이어리를 하나씩 꺼내 놓았다. 서로의 다이어리를 구경하며 나는 올 한해 각자의 다이어리가 어떤 이야기로 채워질지 궁금해졌다. 12월 마지막 모임에 다시 다이어리를 꺼내 보자고 할까.  


페스트균을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그 균은 수십 년간 가구나 옷가지들 속에서 잠자고 있을 수 있고, 방이나 지하실이나 트렁크나 손수건이나 낡은 서류 같은 것들 속에서 꾸준히 살아남아 있다가 아마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또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어서 어느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401p)


그래도 우리는 내일을 꿈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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