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나의 집에게'를 읽고..
까맣게 있고 있었다. 해야 할 일과 챙겨야 할 것들에 치인 현재의 삶을 살다 보니, 과거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기억은 선택적이라고 했던가. 어쩌면 생각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던 나의 20대를 말이다.
마치 처음부터 지금의 모습이었던 것처럼 과거를 잊은 채 지내왔었다. 나 같은 사람이 많은지 기계가 사람들의 추억을 꺼내주는 세상이다. 아이폰은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이나 특정 연도의 사진들을 테마별로 묶어 나에게 알림을 보내온다. 담아두고 싶은 순간들을 포착한 사진을 보며 잠시 감상에 젖어 과거를 회상하기도 한다.
그러다 내 심연의 끝에 고이 잠들어 있는 과거를 불러내 준 책을 만나게 되었다. 하재영 작가의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라는 책이다. 좋은 책은 읽으면서 독자를 자꾸 멈추게 하는 책이라고 한다. 책 속의 좋은 문장을 만날 때마다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문장 안에 나를 가두고 내 이야기를 대입해 보기도 했다. 경제적 사정에 따라 극과 극의 집을 경험했던 작가의 서사는 나의 과거와 자연스레 연결되었다.
그동안 잊고 지냈던 내가 살아온 집들이 하나둘씩 생각나기 시작했다. 고향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가게 안의 살림집, 육 남매에 비해 턱없이 작았던 공간 때문에 할머니댁에 방을 만들어 언니와 지냈던 기억, 대학교 때의 기숙사, 친구의 자취방에 살았던 기억, 그리고 서울 생활을 하면서 숱하게 옮겨 다녔던 나의 공간들이 떠올랐다.
내가 살았던 집은 당시 내가 처한 상황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었다. 집은 나에게 평온한 휴식처라기보다 벗어나고 싶은, 지금보다 더 나은 집으로의 이동을 항상 꿈꾸게 하는 곳이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집은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 일구는 것이 아닌 공동의 공간이 되었다. 두 사람이 공존하는 공간은 함께라서 행복하기도 했다가 각자의 라이프스타일이 충돌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친애하는 집에게라는 책은 잊고 있었던 나의 집들을 한꺼번에 불러냈다. 가슴이 저려왔다. 나의 20대는 여러 집을 전전하며 견뎌온 시간들이기 때문이다. 불현듯 내가 거쳐온 집들에 대해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쓰고 나면 나의 20대가 더 선명해질까. 일기를 쓰면 하루를 두 번 사는 느낌이라고 하던데, 과거를 다시 응시하면 그때의 나를 어떻게 해석하게 될까.
집에 대해 쓰는 것을 그 집에 다시 살아보는 일이었다. 간절히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었고,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돌아가고 싶거나,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은 공간이 아니라 시절일 것이다. 과거가 되었기에 이야기로서의 자격을 부여받은 시절. 나는 집에 대해 쓰려고 했지만 시절에 대해 썼다. 내가 뭔가를 알게 되는 때는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이다. 현재의 집이 가진 의미를 깨닫는 것도 이곳을 영원히 상실한 다음일 것이다.(p198)
언제나 두려운 것은 내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이다. 설익은 내가 말과 글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까 봐, 미래의 내가 현재의 나를 두고 자책할까 봐 두렵다. 나의 이야기를 인쇄될-박제될 글로 남기는 것은 그런 두려움을 무릅쓰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 것은 이토록 불완전한 내가 또 다른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여전히, 간절히, 기대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 중에서)
예전에도 그랬듯 지금도 여전히 집 안에서 나만의 공간을 갖길 꿈꾼다. 작가는 나만의 공간이 없다면 나만의 책상이라도 가져보라고 권유한다.
새 집에 이사오며 구입한 커다란 원목 식탁이 나만의 공간이 되길 바랐지만 공동으로 사용하는 식탁은 나만의 공간이 될 수 없었다. 책을 읽다가 밥 먹을 시간이 되면 읽던 책을 치우고 음식들을 올려야 했다. 쇼파에서 책을 보다가도 가족들이 티브이를 켜면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가족들이 거실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 지금도 나는 아들의 책상에서 글을 쓰고 있다.
나만의 공간을 갖는다는 것은 물리적인 장소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하던 일을 더 이상 멈추지 않아도 되는 공간, 다른 용도로 함께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온전히 나만을 위한 공간'에서 나는 계속 쓰길 소망한다.
기억하기와 글쓰기의 공통적 속성은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편집을 한다는 것이다. 책에 쓰인 글은 여러 버전의 과거 가운데 내가 선택한 것이다. 무엇을 드러내고 무엇을 감출지, 무엇을 부각하고 무엇을 축소할지 결정하는 일은 '과거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하는 문제만이 아니라 '현재를 어떻게 응시할 것인가'하는 고민과도 맞닿아 있다(p216)
책을 덮고 나서 다시 용기를 얻었다. 40대가 된 지금, 과거의 나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게 될까.
집들에 대해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한 것도, 기록해도 괜찮다고 다독여 준 것도 하재영 작가다. 그 무엇이 됐든 나의 '선택'으로 쓰인 것들은 과거만이 아닌 현재와 연결되어 있다는 희망을 보았으므로.